1) 생몰년도 : 미상
2) 본관 : 안동(安東)
3) 주요년보 : 930년(태조 13년) -권행, 장길(장정필) 등과 함께 왕건을 도와 병산전투에서 전공을 올림
1-1. 김선평의 생애
신라말 경애왕때 고창(안동)의 성주로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자 930년(경순왕 4년)에 권행, 장길과 함께 향병을 모으고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무렵 고려에 귀순하여 개국공신이 되고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부(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에 봉해지고 안동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2. 권행(權行) 기본정보
1) 생몰년도 : 미상
2) 본관 : 안동(安東)
3) 주요년보 : 930년(태조 13년) -김선평, 장길 등과 함께 왕건을 도와 병산전투에서 전공을 올림.
2-1. 권행의 생애
≪고려사≫ 태조세가에는 행(行)이라 하였다. 본성은 김(金)이라고 한다. 신라 고창(현 안동)의 수령으로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비빈(妃嬪)을 능욕하며 장안을 분탕한 데 몹시 분개하여 성주 김선평, 장길과 함께 ˝견훤은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적이니 왕건(王建)에게 귀순하여 우리 원수를 씻어야 하리라˝하고 고려에 항복하였다. 930년(태조 13) 왕건과 견훤의 격전지인 병산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 전공으로 인해 고려 태조가 ˝상황을 바로 살펴 권도(權道)를 잘 취했다˝하여 권(權)으로 새로이 성(姓)을 주고 안동을 본으로 삼게 하였으며, 대상(大相)이라는 관계(官階)를 내려주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부(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로 봉해진 기록도 보인다.
3. 장길 기본정보
1) 호/이름 : 포음(圃陰)/길(吉)
2) 생몰년도 : 신라 진성왕 2년(888) ~ 고려 경종 3년(980)
3) 본관 : 안동(安東)
4) 주요년보
장길 연보
년도
내용
888년(1세)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장군인 장원의 아들로 태어남.
892년(5세)
아버지를 따라 신라로 망명함.
905년(18세)
중국으로 파견하는 정조사를 따라 다시 중국에 들어감.
911년(24세)
중국에서 문과에 장원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함.
930년(43세)
김선평, 권행 등과 함께 왕건을 도와 병산전투에서 전공을 올림.
980년(91세)
안동에서 사망함.
3-1. 장길의 생애
장길은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장군인 장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5세 되던 892년(신라 진성여왕 4년) 나라 정치가 문란하자 아버지를 따라 신라에 망명하였다. 강릉에 살다가 경북 노전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그후 18세 때에 중국으로 파견하는 정조사를 따라 다시 중국에 들어가 24세 때에 문과에 장원 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제자를 가르쳤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명성이 천자에게 까지 알려져서 한때 벼슬이 이부상서에 까지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우리나라에 다시 들어와 경북 인동 노전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930년(경순왕 4년)에 김선평, 권행과 함께 향병을 모아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대상(大相)이라는 관계와 안동을 본으로 하사받고 안동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후 다시 인동(仁同)에 물러가 강학 하다가 만년에 안동으로 옮겨 경종3년에 몰하니 향년 91세였다. 안동부(安東府)의 백성들이 그 공덕을 추모하여 성종2년 사당을 세워 삼태사(三太師)를 함께 제사한다. 세조3년 이대사성의 상소로 왕명으로 노전(盧田:仁同)에서 서원을 세우고 사액하였으며, 동 2년 부원군(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삼태사는 신라말기 안동의 성주 김선평(金宣平), 권행(權行), 장길(張吉)을 말한다. 이들은 930년(경순왕 4년) 후삼국이 패권을 다투던 역사적 전환기에, 함께 향병을 모으고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안동)의
병산전투에서 후백제의 견훤을 물리치고 고려왕조의 개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선평(金宣平)은 고려가 개국할 무렵 고려에 귀순하여 개국공신이 되고 벼슬이 태광태사(太匡太師)가 되었다. 뒤에 벼슬이 아보(亞父)에 이르렀으며 안동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권행(權行)은 ≪고려사≫ 태조세가에 의하면 행(行)이라 하였고, 본성은 김(金)이다. 신라 고창(현 안동)의 수령으로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략하여 경원왕을 죽이고 비빈(妃嬪)을 능욕하며 장안을 분탕한 데
몹시 분개하여 성주 김선평, 장길과 함께 "견훤은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적이니 왕건(王建)에게 귀순하여 우리 원수를 씻어야 하리라"하고 고려에 항복하였다. 930년(태조 13)의 왕건과 견훤의
격전지인 병산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 전공으로 인해 고려 태조가 "상황을 바로 살펴 권도(權道)를 잘 취했다"하여 '權'으로 새로이 성(姓)을 주고 안동을 본으로 삼게 하였으며, 대상(大相)이라는 관계를
내려주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아부(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亞父)로 봉해진 기록도 보인다.
장길(888~980)은 호는 포음(圃陰)이다. 888년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장군인 장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함께 5세 되던 892년(신라 진성여왕 4년) 문란한 정치를 피해 신라로 망명하여,
강릉에 살다가 경북 노전(盧田:仁同)에 정착하였다. 그후 18세 때에 중국으로 파견하는 정조사를 따라 다시 중국에 들어가 24세 때에 문과에 장원 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제자를 가르쳤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명성이 천자에게 까지 알려져서 한때 벼슬이 이부상서에 까지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우리나라에 다시 들어와 경북 인동 노전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930년(경순왕 4년)에 김선평, 권행과 함께 향병을 모아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대상(大相)이라는 관직과 안동을 본으로 하사 받고 안동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다시 인동(仁同)에 물러가 강학 하다가 만년에 안동으로 옮겨 경종3년에 몰하니 향년 91세였다. 안동부(安東府)의 백성들이 그 공덕을 추모하여 성종2년 사당을 세워 '삼태사(三太師)'를
함께 제사한다. 세조3년 이대사성의 상소로 왕명으로 노전(盧田:仁同)에 서원을 세우고 사액하였으며, 동 2년 부원군(府院君)에 추증했다.
현재 안동지역에는 이들과 관련한 유물로 태사묘, 안동김씨태장재사(安東金氏台庄齋舍), 안동권씨능동재사(安東權氏陵洞齋舍), 안동장씨성곡재사(安東張氏城谷齋舍) 등이 있다. 태사묘는 안동시 북문동 24-1에
소재(대지 1229평)하며, 태사묘우(太師廟宇), 숭보당(崇報堂), 경모루(景慕樓), 동재(東齋), 서재(西齋), 주사(廚舍), 전사청(典祀廳), 안묘당(安廟堂), 보물각(寶物閣), 차전각(車戰閣) 등 기념물
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퇴치한 삼태사는 고려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 휘(諱) 김선평(金宣平), 휘 권행(權幸), 휘 장길(張吉), 즉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 시조를 모시고 춘추중월중정일(春秋仲月中丁日)에 향사(享祀)하는 사당(祠堂)이다. 태사묘에 내부에는 이들과 관련한 고려 초기의 유물이 보물 제45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곳에 소장된 3공신의 일괄유물은 관모, 신발, 과대, 그릇, 시저(匙箸), 포(布) 및 교지(敎旨) 등이 있다. 또한 안동지역에는 삼태사와 관련한 “지렁이 장군 견훤을 물리친 삼태사”, “삼태사의 위패를
지킨 안금이”와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안동태사묘삼공신유물(安東太師廟三功臣遺物)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 태사묘에 있는 고려 초기의 유물로서 보물 제4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 소장된 3공신의 일괄 유물은 관모, 신발, 과대, 그릇, 시저(匙箸), 포(布) 및 교지(敎旨) 등이다.
그러나 3공신의 여러 유물이 혼재되어 있어 누구의 것인지 분명히 파악할 수 없으며, 교지와 숟가락 등에서 보이듯 고려 초기뿐 아니라 후기의 유물들도 상당수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각각의 현상과 크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흑관모(黑冠帽) 1개
높이 20㎝.
윗부분이 4각이며 양옆으로 타원형 날개가 달린
전형적인 고려시대 관모로서 말총으로 만들어졌다.
혁과대 4벌
길이와 너비는 각각 142×6㎝, 140×5.5㎝, 172×5㎝,
110×4㎝. 4벌 모두 손상이 심한 편이나 그 중 1벌에는
대구(帶鉤)부분에 오목새김의 화문과 과판, 안으로는
돋을새김의 포도당초문을 정교하게 장식하였다.
신발(履) 1족
높이 29㎝. 목이 길고 앞축은 위로 말려 반원형을 이루었다. 가죽제로서 신발의 내면에는 마(麻)를 대었고, 바닥에는
두꺼운 가죽으로 여러 번 덧대어 꿰매었다.
동시저(銅匙箸) 1벌
숟가락길이 28.4㎝, 젓가락길이 15.9㎝·14.5㎝·10.5㎝. 숟가락은
시면(匙面)이 가늘고 길며, 손잡이 끝부분을 연미형(燕尾形)
으로 장식하였다. 젓가락은 현재 3부분으로 절단되어있다.
숟가락 손잡이가 굴곡이 없이 거의 직선적인 점으로 미루어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칠탁잔(朱漆托盞) 1개
높이 4.5㎝. 대(臺)의 겉과 잔에는 주칠을 하였고, 대의 속면과
잔의 굽면에는 흑칠(黑漆)을 하였다.
견포(絹布) 7편
견포는 크게 2종으로서, 1편에는 담황색 바탕에 화문수(花文繡)가 놓여 있다(길이 54㎝, 너비 49㎝). 또, 한종류는 모두 6편으로서 수는 없으나 각종의 꽃무늬가 장식되었다(연두색 4종, 담홍색 1종,
적황색 1종).
부채〔布扇〕 1개
길이 47.5㎝.
비단천 주위로 가는 나무를 앞뒤에 대고손잡이를 달았다
동인(銅印) 2개
가로 4.2㎝, 세로 9.3㎝, 높이 3.4㎝(같은 크기).
장방형으로서 상부에 손잡이가 달려 있고 저면에 각인(刻印)되었다.
교지 1매
묵서로 된 교지로서 공민왕의 친필로 전한다. 그 시기는 1360년
(공민왕 9)이다. 이 밖에 유제합(鍮製盒) 1점과 옥관자(玉貫子)
2점이 함께 전한다.
운곡서원(雲谷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에 있는 서원. 1784년(정조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행(權幸)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추원사(追遠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권산해(權山海)와
권덕린(權德麟)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운곡서원으로 개편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0년 유허지(遺墟址)에 설단(設壇)하여
향사 향사 : 서원에서 공자등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를 말한다.를 지내왔으며, 197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경덕사(景德祠), 신문(神門), 5칸의 중정당(中正堂), 각 1칸의 동무(東黛)와 서무(西黛),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외삼문(外三門), 6칸의 유연정(悠然亭),
주소(廚所) 등이 있다. 묘우인 경덕사에는 권행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동무에는 권산해, 서무에는 권덕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중정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 서재와 유연정은 유생들이 수학하며 거처하는 곳이고, 전사청은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초정(初丁 :
첫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 4두(豆)이다.
유물로는 ≪태사실기 太師實記≫, ≪죽림실기 竹林實記≫, ≪구봉집 龜峰集≫, ≪효경 孝經≫, ≪두고세고 杜蹇世稿≫ 등의 목판과 문집 약간 권이 소장되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7,000평, 임야 84정보 등이
있다.
태사묘
태사묘는 안동시 북문동24-1에 소재(대지 1229평)하며, 태사묘우(太師廟宇), 숭보당(崇報堂), 경모루(景慕樓), 동재(東齋), 서재(西齋), 주사(廚舍), 전사청(典祀廳), 안묘당(安廟堂),
보물각(寶物閣), 차전각(車戰閣) 등 기념물 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신라를 공략한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퇴치한 삼태사는 고려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
휘(諱) 김선평(金宣平), 휘 권행(權幸), 휘 장길(張吉), 즉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
시조를 모시고 춘추중월중정일(春秋仲月中丁日)에 향사
향사 : 서원에서 공자등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를 말한다.
(享祀)하는 사당(祠堂)이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 부사내(府司內) 삼공신묘를 창건하였다. 삼공신위판(三功臣位版)은 부사에서 객사로 옮겨 모시다가 중종 37년(1542년) 강릉인 김광철이 안동 부사로 재임시 처음으로 묘우(廟宇)를
이 자리에 세웠다. 당시 정초, 단오, 추석, 동지의 사절사를 봉행하였으나 1585년 당시 도유사(道有司) 송암 권호문의 주창으로 춘추향사(春秋享祀)키로 결정, 지금에 이르렀다. 1608년 11월 유사
권중상, 권함, 김태, 장흥효 등이 삼공신 위판을 개제주(改題主)하였으며 권오(權晤)가 썼다. 1613년 7월에 경상감사 권반, 경주부윤 권태일이 구묘(舊廟)를 증축하고, 삼공신묘를 태사묘로 개칭하고 현판은
권복흥이 썼다. 경종 원년 1721년 3월 16일 안동서문에서 일어난 대화재시에는 부사(府司)도 탔으나 묘우만은 보전되었다. 즉후 삼태사공 후손과 향당(鄕黨)의 덕망 있는 자와 공논(公論)하여 중건공사를 착공
1년 만에 옛모습으로 완공하였다.
임진란 때 묘직(墓直)인 안금이(安金伊)가 후손도 하지 못한 삼태사위판을 길안면 국란 계곡 깊은 동굴에 모시고 3년이나 봉안(奉安)하다가 평란(平亂)후 환안(還安)하니 나라에서 그 뜻이 갸륵하다 하여
첨지(僉知)의 벼슬을 내리고 경내 일각에 안묘당(安廟堂)을 세우고 봉안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경인란시에는 폭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별유사(別有司) 장봉섭이 삼태사 위판을 성곡동 장씨
광풍정(光風亭)에 이안(移安)하였다가 익년 8월13일에 능동 안동권씨 재사 보판각으로 이안하고 매년 춘추 향례를 봉행하여 오다가 1953년에 3성 후손이 중건 위원회를 발족하여 후손들의 성금으로 새로 중건하니
묘우, 숭보당(崇報堂), 전사청(典祀廳), 동서재(東西齋), 안묘당(安廟堂), 주사(廚舍) 등 공사를 마치고 1958년 9월에 삼태사공 위판을 환안봉안(還安奉安)하고 고유(告由)하였다. 1950년
경인난(6.25동란)때는 묘역이 폭격으로 소실되었으나 후손의 성력으로 13년에 걸쳐 1963년에 완전 복원하였고 보물각(寶物閣), 경모루(景慕樓)도 이어 준공하였다. 그 후 수 십여년 간에 퇴락으로 3성
후손들이 걱정하여 오던 중 도유사(道有司) 김중한이 입재(入齎)하여 묘우 및 경내 건물 보수관계를 태사묘관리위원들과 협의하여 관계기관과 절충한 결과 국가 보조금으로 1993년부터 3년에 걸처 묘우를 비롯하여
경내 건물과 담장을 깨끗이 일신하였다.
안동김씨태장재사(安東金氏台庄齋舍)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서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6호이다. 안동김씨 태장재사는 시조인 태사 김선평(金宣平)의 단소(壇所)를 지키고 봉향(奉享)을 위해 건립한 재사(齋舍)이다.
이것은 안동지역의 재사 가운데서 규모가 크고 각 부분이 용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건물이다.
재사는 1711년(숙종 37)경 작은 집을 지었다가 1749년(영조 25)에 확장하였는데, 식수난과 질병이 겹쳐 사헌부 지평 김양근(金養根)이 경향각처의 뜻을 모아 현 위치에 승려의 집을 철거하고 터를 닦아
1793년(정조 17)에 28칸을 중건하고 익실(翼室 : 분채의 좌우 편에 달린 방)과 문루(門樓)를 옮겨지었다. 1913년 주사(廚舍)를 현위치에 확장하여 10칸을 중건했고, 1960년 풍수해를 당해 재사를
보수했다. 재사는 一자형의 이상루(履霜樓)와 口자형의 재사, ㄷ자형의 관리사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는 日자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다.
재사는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과 전사청, 참제원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상루는 묘제(墓祭) 뒤에 음복과 문중회의를 여는 장소로 사용된다. 재사는 민도리집의 간결하고 검소한 건물이나, 누(樓)는
이익공(二翼工)의 팔작지붕건물로 누상부(樓上部)에는 3면에 판벽을 치고 판문을 설치하였다.
안동권씨능동재사(安東權金陵洞齋舍)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재사(齋舍). 중요민속자료 제183호. 고려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인 권행(權幸)의 재사이다.
초창(初創)은 1653년(효종 4) 관찰사 우(우)가 종인(宗人)들과 논의하여 마루, 방, 곳간 등 16칸을 건립하였고, 그 뒤 1683년(숙종 9) 관찰사 시경(是經)이 누각 7칸을 추가로 지었다. 그러나
1743년(영조 19)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어 중건하였다.
1896년 다시 화재를 입어 당시 70여 칸의 건물 중 임사청(任祀廳), 전사청(典祀廳) 등 몇 칸만 남기고 모두 소실된 것을 1896년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재사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 왼쪽에 높은 축대를 쌓아 추원루(追遠樓)를 전면에 내세워 문루를 삼았다. 누문 안의 큰마당 건너 우뚝 솟은 재사 큰채와 그 앞 양쪽에 늘어선 동재, 서재가 튼ㅁ자를
이루었다.
또 동재의 뒤쪽에 임사청, 전사청, 주사(廚舍)가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일곽을 이루고 있어서 전체 배치가 日자를 옆으로 뉘어놓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추원루는 누하에 다락문을 내고 그 앞에 여러 단의 자연석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하게 하였다.
통로의 좌우에는 일부 흙과 판자로 벽을 치고 수장(收藏)공간을 마련하였다. 능동재사는 사랑채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원래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방 2칸, 오른쪽에 방 1칸을 둔 정면 5칸집이었으나
왼쪽 끝에 방 2칸을 첨가하여 규모를 증대시켰다.
동재(안사랑채), 서재(헛간채)는 각 3칸으로 서재는 방 2칸에 부엌 1칸, 동재는 방 2칸에 전사청 마당으로 통하는 문간이 1칸 놓여 있다. 임사청(별당)은 주사(안채)와 일곽을 이루며 북편의 축대 위에
배치되었는데, 어칸이 마루로 되어 있고, 좌우에 방을 1칸씩 드렸다.
전사청(곳간채)은 ´공성재(供城齋) ´ 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정면 3칸집의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하고 그 뒤쪽에 수장고를 3칸 두었기 때문에 제기고(祭器庫)라고도 한다.
집의 구조를 보면 추원루의 누하주(樓下柱)는 8각주로 자연석 초석 위에 놓았다. 누상주(樓上柱)는 두리기둥에 주심포계(柱心包系) 이익공(二翼工)의 공포를 형성하였는데 쇠서는 초각(草刻)과 봉두각(鳳頭刻)으로
조각되어 있다.
지붕 가구는 5량가(樑架)로 종보 위에 사다리꼴 판대공을 세운 윗몸에 첨차를 끼워 마루도리를 받고 있다. 능동재사(陵洞齋舍)는 높은 잡석 축대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운 전퇴(前退)집으로
대청상부는 5량가의 연등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종보 위에 사다리꼴 판대공을 세우고 그 윗몸에 첨차를 끼워서 마루도리를 받게 하였다. 이 집은 구조적인 면에서 큰 특징은 없으나 재사로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의 건물로 조선시대 제례행사의 성대한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훌륭한 건물이다.
안동장씨성곡재사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 있는 이 재사는 안동장씨의 시조이자 삼태사 중 한 명인 장길의 재사이다. 성곡재사는 앞에 누각이 있고 강당과 동.서재를 갖추고 있으며 관리인이 거주하는 집도 따로 마련하였다.
성곡재사의 뒷산에는 안동 장씨의 시조인 장태사공의 단소가 잘 단장되어 있다. 단소로 올라가는 길은 재사의 좌측 편에 나있는데 계단으로 잘 정비하였다. 안동 장씨의 성곡재사와 태사공의 단소는 칠계재(七戒齋)
장세규(張世奎 ) 선생이 문헌과 제도를 따라 중건(重建)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