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이상룡은 1858년 안동면(安東面) 법흥동(法興洞:현 안동시 법흥동)에서 이승목(李承穆)과 부인 권씨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만초(萬初)이며 호는 석주(石洲), 초명은 상희(象羲)이다. 1911년 망명이후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으며 계원(啓元, 啓源)으로 불리기도 했다. 석주는 학문적으로는 퇴계학통을 계승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제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존고모부인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친족인 평담(平潭) 이전(李銓)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19세에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학문을 계승하며 안동지방의 거 유로 성장하였다.
석주가 성리학의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몰입하기 시작한 시기는 29세 되던 1886년경이다. 이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고 성리학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 말 그의 나이 30대에 접어들면서 스승 동문들과 성리철학 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벌렸다. 1894년에는 병학(兵學)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병법에 관한 체계적인 저서인 「무감(武監)」을 저술하고, 재래식 무기인 연노(連弩)를 실제 조작하여 발사 실험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석주는 1900년대 초반까지 주로 향촌사회에서 강회개최, 항음주례시행, 향약제정과 시행 등 성리학적 질서를 향촌에 뿌리내리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본격적으로 의병을 지향하고 나섰다. 1905년 겨울 매제 박경종(朴慶鍾:영해출신)과 함께 1만 5천냥을 모아 가야산에서 거병한 차성충(車晟忠:隱豹)을 지원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 김상태(金相台) 등과도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차성충의 기병이 실패로 끝나자 의병항쟁이 가지는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 돌파구로 석주가 선택한 것은 계몽운동으로의 전환이었다. 1909년 4월 그는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1911년 1월 5일 가솔과 가까운 친척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직후인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포에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서간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청년들을 모아 경학사 부속기관으로 설치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통해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석주는 1911년에서 1918년까지는 서간도로 이주해온 우리 민족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후 1930년 초까지 석주는 중국 각지에 흩어진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에는 만주 한인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이 한족회는 경학사(1911~1913), 공리회(1913~1916), 부민단(1916~1919)의 정신을 계승하여 결성된 만주 한인사회의 민정기관이었다. 여기에서 이상룡은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1919년 4월에 군정기관으로서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최고 대표인 독판에 선임되었다.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일제와의 항쟁을 계속하던 이상룡은 국내에 조직된 의용단(義勇團)과 연결을 꾀하여 그것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그는 1921년에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였고, 이어서 남북 만주와 연해주에 각기 일어나고 있던 독립군단과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2년 6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비롯한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그 후 석주는 1925년 9월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추대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한 이상룡은 당시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을 이끌며 항일투쟁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각(組閣)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세력을 조정, 통합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6년 봄 국무령직을 사임하였다. 임시정부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1926년 2월 만주로 다시 돌아온 이상룡은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 3대 재만광복단체의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만주에서의 항일운동이 매우 어려운 국면을 맞이했던 1932년 5월, 석주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의병에서 시작된 석주의 독립운동은 끝까지 무력항쟁론, 독립전쟁론을 고수해 나간 것으로 평가된다. 또 이상룡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대동역사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역사관련 저술을 남겼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주요참고자료 : 2003, 김희곤,「석주 이상룡의 독립운동과 사상」『민족위해 살다간 안동의 근대인물』, 안동청년유도회 ; 2001, 김희곤,『안동독립운동가 700인』안동시】
대동사(大東史)
유인식(柳寅植)이 편찬한 우리 나라 역사서. 11책. 단군에서 1910년 경술국치까지의 역사를 편년 순서에 따라 기록하였다. 1919년을 전후하여 대체적인 내용을 완성하였으며, 필사본으로 전해 오다 1978년 동산선생기념사업회에서 ≪동산전집 東山全集≫을 발행하면서 신활자로 출판하였다.
편찬 체재는 권수에 대동연혁지총도(大東沿革之總圖), 대동연혁국차도(大東沿革國次圖), 대동족통도(大東族統圖), 대동역대일람도(大東歷代一覽圖) 등 4개의 도(圖)와 17조의 범례가 있다. 본문은 단씨조선기(檀氏朝鮮紀), 남북조기(南北朝紀),고려기(高麗紀), 조선기(朝鮮紀), 부록〔歷代 王室系譜〕의 순서로 되어 있다.
편찬 형식에서의 특징을 살펴보면, 고대사 체계에 있어서 기자조선 이후 고려 통일 이전까지의 상고사 전개 과정을 남ㆍ북 양조의 이원적인 대립관계로 파악하여 남북조기로 설정하고 있다. 기년에 있어서는 단군기원을 큰 글자로 쓰고 각 왕조의 각국 연조를 분주(分註)하였으며, 중국 기년은 우리 나라 사실을 모두 서술한 뒤에 기록하였다. 일본, 몽고, 거란 등도 우리 나라와 관계된 곳에서는 중국의 예에 따라 해당국의 기년을 첨가하여 기록하였다.
전통적인 편년적 서술 형식을 취했으며 논찬을 덧붙이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은 '왈(曰)'로, 자신의 의견은 '안(按)'으로 수록하였다. 이 책의 서술은 전통적인 유학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같은 시기 많은 학자들의 영향이 있었다. 특히 김택영(金澤榮)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듯하다. 이는 왕의 기년표기에 있어 ≪동사집략(東史輯略)≫에 따라 유년칭원(踰年稱元)을 적용하고, 강역비정에 관해서도 정약용의 ≪강역고(疆域考)≫ 내용을 수용했던 ≪동사집략≫의 것을 따르고 있는 점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고려 이전의 역사는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거해 정리하되 부족한 부분은 역시 ≪동사집략≫에 의해 보충하였다. 그러나 조선사는 조야의 잡록과 기년을 편집하되 ≪국조고사(國朝故事)≫와 ≪대동기년(大東紀年)≫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김택영의 ≪한사경(韓史炬)≫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또한 단군 이후 상고사의 전개 과정을 남북 양조의 대립 관계로 정리한 점, 종족적 계통에 있어서는 배달족을 설정하고, 단군조선기에서 김교헌(金敎獻)의 ≪신단실기(神檀實記)≫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 점 등은 대종교(大倧敎) 계열의 역사학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입증한다.
이 책은 1910년의 국치 이후 '조국 정신'이 쇠퇴하게 됨을 우려해,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또한 한민족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화민족임을 보이려는 목적에서 편찬하였다. 특히 통일신라와 발해의 대립 이전에 이미 남북조의 대립이 있었다거나, 유학자이면서도 조선 시기 당론의 폐습을 고질적인 병폐로 적시하고 있는 점 등은, 상고사와 조선 당쟁사 부분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던 그의 역사 인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대동시사(大東詩史)
조선 말기의 민족운동가, 교육자 유인식(柳寅植)의 시화집(詩話集). 1924년에 완성되었다. 1978년 동산선생기념사업회에서 ≪동산문고(東山文稿)≫로 출판하였다.
≪대동시사≫ 서문에서 "시로 말미암아 역사학의 요점을 알고, 역사로 말미암아 시학의 길을 연다."라고 밝혔다. 우리 나라의 민족주체적 사관(史觀)으로 우리 나라의 민족혼을 갱생시키고자 역사서인 ≪대동사 大東史≫를 쓰고 이어서 같은 목적으로 이 책을 썼다.
시를 통해서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를 통해서 민족혼의 갱생을 꾀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거하여 선정기준도 주로 역사와 관계가 깊거나 또는 역사적 인물, 특히 충신, 열사의 시이거나 혹은 역사를 반영하는 작품을 대상으로 삼았다.
≪대동시사≫의 내용은 태조의 〈등백운봉(登白雲峰)으로 부터 시작하여 홍석주(洪奭周)의 〈영사(詠史)〉를 끝으로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302명의 시 445수를 편년체로 싣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비평이나 해설도 독특하다. 종래의 시화집에서는 그 시의 시학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것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시의 창작동기나 역사적 사실 등의 해설에 더 치중하고 있다.
≪대동시사≫의 서사작품인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을 거의 원문 그대로 인용하고, 시조작품 7수를 실은 점이 더욱 특이하다. 이는 모두 사육신에 관계되는 작품으로 그들의 절의지심(節義之心)을 높이 기리어 형식을 도외시한 채로 이 책에 실었다고 본다.
≪대동시사≫는 망국의 한을 품은 애국지사가 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흥기시키려고 역사와 시를 어우러 꾸민 독특한 시화집이다. 시가 사람을 흥기시킨다는 주자(朱子)의 시의 효용성에 대한 이론을 잘 적용하여 현실화시켰다고 하겠다.
동산전집(東山全集)
1978년 동산선생기념사업회에서 편집, 간행하였다. 상책은 ≪대동사(大東史)≫ 11권, 하책은 ≪동산문고(東山文稿)≫ 2권, ≪대동시사(大東詩史)≫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동사≫는 단군(檀君)부터 1910년에 이르기까지 4,243년간의 우리 나라 역사를 편년체의 형식으로 서술한 통사이다. 그리고 하책의 ≪대동시사≫는 고려 및 조선시대를 통하여 애국적, 연민적인 작품만을 뽑아 모은 시집이다.
≪동산문고≫는 권1에 시 12수, 만 13수, 서(書) 28편, 서(序) 1편, 제문 13편, 뇌문 1편, 묘지명 1편, 유사 1편, 잡저 8편, 부록으로 약력(略歷), 광기(壙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는 모두 망국의 한과 우국충정을 나타낸 것들로 되어 있다. 서(書)도 대개 나라의 현실을 걱정하며 민족의 울분을 토로한 내용이 많다.
〈상김척암선생(上金拓菴先生)〉에서는 신채호(申采浩)의 인물됨을 찬양하고, 서구적인 학문으로 교육을 개혁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잡저에는 〈태식록(太息錄)〉,〈학범(學範)〉,〈금사기오(金史記誤)〉,〈우인난(友人難)〉,〈남정일록(南征日錄)〉,〈조선여일본관계(朝鮮與日本關係)〉,〈통백학서당사림문(通白鶴書堂士林文)〉,〈이퇴계선생역사대개(李退溪先生歷史大槪)〉 등이 있다.
이 중 〈태식록〉은 한말 망국적 현실을 탄식하여 쓴 것으로, 송나라 소식(蘇軾)의 〈태식삼편(太息三篇)〉을 본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모두 3장으로 구분하여 제1장에서는 나라의 폐단을 군권태중(君權太重), 훈척세신지화(勳戚世臣之禍), 당론지화(黨論之禍), 존대학자(尊待學者), 소무비(疎武備), 과거지폐(科擧之弊), 용인상벌(用人尙閥), 사대주의(事大主義), 전부민적지폐(田賦民籍之弊), 이서지폐(吏胥之弊) 등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그리고 제2장에서는 유림의 폐단을 경학가(經學家), 과거가(科擧家), 숭배유현(崇拜儒賢), 유원(儒院), 경학가지전제(經學家之專制), 호가지전제(豪家之專制), 가정교육범위지협착(家庭敎育範圍之狹窄), 박생재(薄生財) 등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제3장에서는 이러한 폐단의 책임이 근본적으로는 유림에 있다고 지적, 이의 시정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학범〉은 이원박(李源博)과 김동택(金東澤)의 질문에 대답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입지(立志), 양심, 윤리학, 공덕심(公德心), 열성(熱誠), 의력(毅力), 함축(涵畜), 치신(治身), 독서, 궁리(窮理), 학문, 합군(合群), 경세(經世), 이상(理想), 종교사상 등 15개 항목으로 나누어 수기(修己), 치인(治人)의 대강을 논한 것이다.
〈남정일록〉은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의 설립을 위하여 1923년 경상남도 경상북도 일대를 순회하였을 당시의 일기이다. 이 전집은 근대사연구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차야한십절(此夜寒十絶)
1920년 유인식(柳寅植)이 지은 한시. 칠언절구. 10수. ≪동산고 東山藁≫에 수록되어 있다. 〈차야한십절〉의 첫머리에 "사천 이백 오십 삼 년 일월 십 일 밤에 바람과 추위가 심할 때에 화롯가에 혼자 앉아 이 시를 읊는다."라고 적혀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의 억압이 가중되는 상황을 다룬 이 작품은 현대시가 따르기 어려운 의식의 각성을 나타내고 있다. 밤이 차갑다는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모멸에 찬 삶의 고난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민족독립을 지향하는 불굴의 의지를 볼 수 있다. 신세타령이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애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조망하고 해외에서 한 투쟁까지 다루고 있다.
〈차야한십절〉 제 1수는 먼저 고개에 있는 정자의 정경을 말한다. 그리고 서리는 벽지에 엉기고 눈은 난간에 쌓인 이 추운 밤에 손수 땔나무를 해다가 양친을 따뜻하게 해드린다는 내용이다.
〈차야한십절〉 제 2수는 판잣집에 바람 부는 이 추운 밤에 장엄한 기운과 엷어진 가을 하늘에 애국청년들의 피의 대가로 옥에 갇혀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은 혼이 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차야한십절〉 제 3수는 해외동포는 이 추운 밤에도 세찬 국제정세 속에 맨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시대가 영웅을 나게 하며 대한민국 원년의 서광이 비치리라는 내용이다.
〈차야한십절〉 제 4수는 중국의 눈보라, 요동(遼東)의 찬바람 부는 이 밤에 이국에서의 피눈물나는 고생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멀리 고국에 있는 동지를 생각하며 이 밤도 머리 맞대고 망국 설움에 잠 못 이룰 것이라는 내용이다.
〈차야한십절〉 제 5수는 학계의 제자들을 생각하며 홑이불에 불도 지피지 않은 찬 방에서 지낼 모습은 말로 다 못한다. 그러나 조국 강산은 그들 어깨에 달렸다고 기대하는 마음을 읊고 있다.
〈차야한십절〉 제 6수는 사회 여러 사람들은 이 추운 밤에 차가운 공부방의 책상머리에서 피 뿌리며 유려한 문장으로 국민들의 분발을 환기시키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내용이다.
〈차야한십절〉 제 7수는 장사하는 겨레들은 이 추운 밤에 새벽 가게에 나가 술 한잔 마시려 하여도 주머니에 돈 한푼 없다. 그런데 외국의 간상(奸商)들은 시장돈 다 긁어 가버리고 세모에 혼자 앉아 빈 가게만 지킨다는 내용이다.
〈차야한십절〉 제 8수는 노동하는 겨레들은 이 추운 밤에 빙판길 눈보라에 구르듯 달려간다. 그런데 4,000년이나 이어온 신명이 주신 이 겨레 이민족의 채찍을 어찌 견딜까 하고 읊고 있다.
〈차야한십절〉 제 9수는 "어둡고 그늘진 내 땅에서 이 추운 밤에 동쪽 한국에는 시름 없는 곳이 없다. 듣자하니 돈 많은 후작들이 사는 마을에는 석탄 난로에 모피 휘장 봄 날씨처럼 따뜻하리."라고 일제에 빌붙어 사는 매국노들의 호사를 풍자하고 있다.
〈차야한십절〉 제 10수는 "그러나 궁한 집안 추운 이 밤 한탄하지만 말아라, 땅 속의 양기(陽氣)가 다시 이미 열흘이나 지났으니 이마적에 동풍(봄바람)이 대지에 불어 죽은 뿌리 마른 나무에 꽃(광복)을 피워다오."하고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고 있다.
〈차야한십절〉은는 고사(故事)가 없다., 매수의 첫 구 끝이 "차야한(此夜寒)"으로 되어 있다. 애국청년, 해외동포, 친우, 학계, 사회인사, 상인, 노동자 등의 4천만 민족을 골고루 시에 등장시켜 그 고통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조국 광복을 염원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근대의 문학작품으로 선도적인 위치에 있을 만하다. 그러나, 한시이기 때문에 널리 읽힐 수가 없었다.
지팡이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이 김규식(金奎植)으로부터 증정 받은 지팡이로 용의 형상과 매우 흡사하다. 이상룡의 손부 김해허씨(金海許氏 : 허은여사)의 전언에 따르면 이 지팡이는 중국 만수산(萬壽山)의 천연 목으로 제작된 것으로 김규식이 어느 승려에게 두 개를 구해 하나를 석주에게 준 것이라 한다. 일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상룡의 생애를 고려할 때 이 지팡이 역시 민족항쟁의 숨결이 깃든 유품이다.
관련문헌
1. 1973, 고려대학출판부,『석주유고』
2. 1996, 석주선생기념사업회, 『석주유고(石洲遺稿)』후집
3. 1975, 최덕수, 「석주 이상룡 연구 - 1910년 전후의 활동을 중심으로」, 『사총(史叢)』19, 고대사학회
4. 1980, 박영석, 「일제하재만한인사회의 형성」, 『한국사학』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5. 1981, 박영석, 「석주이상룡연구」, 『역사학보』89,
6. 1981, 박영석, 「일제하재만한국류이민 신촌낙형성에 관한 연구」, 『동국사학』15,16
7. 1988,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처
8. 1992, 국가보훈처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 국가보훈처
9. 2001, 김정미, 「석주 이상룡의 독립운동과 사상」, 경북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10. 2001, 김희곤,『안동독립운동가 700인』, 안동시
11. 2003, 김희곤,「석주이상룡의 독립운동과 사상」『민족위해 살다간 안동의 근대인물』, 안동청년유도회
관련문헌
1. 안병열, 「동산시문학연구」, 『안동문화』 4, 안동대학안동문화연구소, 1983.
2. 안병열, 「유인식의 문학사상」, 『한국문학사상사』, 계명문화사, 1991.
3. 동산선생기념사업회, 「대동사」, 『동산전집』, 1978.
4. 이가원, 「동산고」, 『한국한문학사』, 보성문화사, 1981.
5. 동산선생기념사업회, 「동산전서」, 『동산문고』, 1978.
6. 정순목, 「동산 유인식의 교육개화운동고」, 『교육철학』 3, 한국교육철학회, 1981.
7. 김희곤,「동산 유인식의 생애와 독립운동」『민족위해 살다간 안동의 근대인물』, 안동청년유도회 2003,
8. 김희곤,『안동독립운동가 700인』 안동시, 2001
관련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