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식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성래(聖來), 호는 동산(東山)이다. 동후면(東後面; 현재 예안면) 주진동(舟津洞) 삼산(三山)에서 유필영(柳必永)과 청주정씨(鄭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9손축인 기영(祈永)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동산의 가문은 대대로 관직 진출자가 많은 안동의 명문 중의 하나였다. 아버지 유필영은 퇴계학통을 계승한 유치명(柳致明)의 제자였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유림들의 항쟁인 파리장서의거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인물이다. 동산은 이와 같은 가문의 배경 속에서 30세까지는 김도화(金道和)의 문하에서 전통적인 영남유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는 28세 되던 1893년 과거를 보러 상경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마지막?시험이었던 이 과거에서 제도의 문란과 조정의 부패를 목격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귀향하였다. 귀향 후 학문에 전념하던 그는 곧 외세의 침략을 감지하고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가하였다. 동산의 독립운동은 1895년 말 의병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의병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국내의 산수를 돌아보며 형세를 살피는 등, 10년 동안 민족의 길을 찾는데 몰입하였다. 그러다가 1903년? 성균관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 때 유인식은 신채호(申采浩), 장지연(張志淵) 등과 교류하며 서구의 근대사상과 학문에 심취하게 되었다. 특히 신채호와의 만남은 그의 사상과 행동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전기가 되었다.
1904년부터 그는 본격적인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신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고향인 안동에 근대식학교 설립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전통을 고수하는 유림들은 강하게 그를 비판하였다. 심지어 그는 생부인 유필영으로부터 부자의 관계를 끊기는 아픔을 당했고, 스승 김도화로 부터도 파문 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은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동산은 결국 1907년 봄 임하 내앞[川前]에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에 취임하였다. 이후 그의 계몽운동의 행보는 계속되었다. 1907년 11월에는 대한협회 조직에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신민회(新民會)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참여하여 교육구국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협동학교의 업무를 유동태에게 위임하고, 이상룡(李相龍), 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서간도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에 정착한 그는 경학사(耕學社) 조직에 참여하고, 교육부장을 맡아 독립운동기지 건설 및 이주 한인들의 생활안정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흉작이 거듭되어 경학사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는 1912년 7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잠시 귀국하였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석방 후 유인식은 망명을 포기하고 국내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10년대 그의 국내활동은 교육운동과 역사서 서술이라는 두가지 측면으로 대별된다. 그는 1917년 다시 협동학교를 맡으면서 망명으로 못다 한 그의 교육이념을 실천에 옮겼다. 또한 귀국 후 ≪대동사(大東史)≫의 저술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동사≫는 단군에서 시작하여 경술국치까지 4243년간의 우리나라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서술한 총 21권 11책의 통사이다.? 이 저서는 교육이 철저히 억압당하고 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귀중한 작업이었으며, 그 자체가 바로 적극적인 항일 운동이었던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의 교육운동은 1920년에도 계속되었다. 1920년 이상재(李商在), 유진태(柳鎭泰) 등과 함께 전국교육기관을 통일하여 조선교육회를 창립하였다. 1923년 3월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 발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선전부장으로서 경상도를 순회하며 강연을 통해 지방의 청년, 지식인들을 고무시켰다. 한편 유인식은 1920년대 또 한번 인식의 변화를 보였다. 그가 대중을 지도하는 사회운동에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1920년 그는 박중화(朴重華)와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설립에 참가,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는데 이는 3.1운동을 통해 그가 대중을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독립운동계에 좌우합작운동의 결과인 신간회가 탄생하자 8월에 안동지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활동하며 안동지역 사회운동을 지도하였다.
협동학교에서 출발한 동지들이 만주지역에서 항쟁하고 있는 동안 계몽운동가 - 역사서술가 - 사회운동가를 넘나들며 활동하던 류인식은 1928년 4월 29일 생을 마감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를 비롯한 안동의 청년운동단체들은 류인식의 장례를 안동사회장을 치르려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의 묘는 예안면(禮安面) 계곡리(桂谷里)에 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대동사(大東史)≫, ≪대동시사(大東詩史)≫, ≪동산문고(東山文稿)≫등이 남아있다.
【*주요참고자료 : 2003, 김희곤,「동산 유인식의 생애와 독립운동」『민족위해 살다간 안동의 근대인물』, 안동청년유도회 ; 2001, 김희곤,『안동독립운동가 700인』안동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