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 김동삼은 서간도 독립군기지개척의 선구자였으며, 만주독립군의 통합에 노력했던 독립운동가이다. 1878년 6월 임하면(臨河面) 천전동(川前洞:내앞) 278번지에서 한학자 김계락(金繼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본명은 긍식(肯植), 자는 한경(漢卿)이었으나, 만주로 망명하여 이름은 동삼(東三), 자는 성지(省之), 호는 일송(一松)으로 고쳤다. 유년시절에는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의 문하인 김주병(金周秉)에게서 전통교육을 받았다.
한국근대 질곡의 긴 역사 속에서 독립을 향한 김동삼의 본견적인 행보는 1907년부터 시작되었다. 김동삼은 1907년 3월 유인식(柳寅植), 김후병(金厚秉), 하중환(河中煥) 등과 함께 안동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활동하였다. 협동학교에 재직하면서 그는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와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집안 어른 김대락(金大洛)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1년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도착한 김동삼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고 경학사(耕學社) 사장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東三省)의 호칭을 따서 동삼(東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914년에는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그 분교, 노동야학 졸업생 385명을 인솔하여 통화현(通化縣) 팔리초(八里哨) 깊은 산 속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립하고, 그 장주(庄主)가 되었다. 이는 김동삼이 만주 독립군의 거장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시점이다.
1919년 국내 3.1운동의 영향으로 길림에서도「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 이때 김동삼은 민족대표 39인의 한사람으로 서명하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서간도 한인사회도 즉각 이에 호응하여 4월 경학사의 후신이었던 부민단(扶民團)을 전 서간도 지역으로 확대하여 한족회(韓族會)를 설립하고 ‘군정부(軍政府)’라는 독립군조직을 편성하였다. 이때 김동삼은 한족회의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가, 11월 ‘군정부’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되면서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22년 6월, 경신참변으로 붕괴되어 버린 동포사회와 독립군을 통합하기 위해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주도하여, 통군부(統軍府)를 탄생시켰다. 8월 30일 전만한족통일회(全滿韓族統一會)가 결성되고, 통군부가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자, 교육부장이었던 김동삼은 통의부 총장을 맡게 되었다.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리자 김동삼은 서로군정서와 남만주(南滿洲)의 한인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당시 국민대표회의가 임시정부의 개조론(改造論), 창조론(創造論)으로 대립할 때 그는 개조론에 가세하였으나, 그 회의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1923년 가을 만주로 돌아온 그는 독립군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의 통합에 주력하였다. 1924년에는 10개 단체대표를 모아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개최하고 의장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그해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키는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4월 15일 길림 남쪽 영길현(永吉縣) 신안둔(新安屯)에서 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리자, 김동삼은 정의부 중앙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28년 5월에는 정의부를 대표하여 삼부통합회의를 열어 분열된 독립운동세력의 대통합을 모색했으나 실패하였다. 1928년 7월 삼부통일회의가 결렬되기 앞서 김동삼은 정의부를 이탈하였으며, 이탈세력을 규합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29년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가 조직되었고, 김동삼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민족유일당 결성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9년 4월 같은 지역에 국민부(國民府)가 출범됨으로써 민족유일당 계획은 무산되고, 1929년 5월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도 해체되었다. 이어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조직되자 김동삼은 고문을 맡았다.
김동삼은 1923년부터 독립군 단체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수습회의장에서 의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했으며, 남만통일회, 국민대표회의, 전만통일회, 민족유일당운동촉성회 등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에 정성을 쏟은 통일의 화신이었다. 지속적인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힘쓰던 김동삼은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북만주로 가서 활동을 모색하던 중 하얼빈에서 일제 밀정의 밀고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시신은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거두어 장례를 지냈는데,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에 그 유해를 뿌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주요참고자료 : 2003, 강만길,「金東三」『민족위해 살다간 안동의 근대인물』, 안동청년유도회 ;2001, 김희곤,『안동독립운동가 700인』안동시; 2000, 조동걸「川前 金門의 獨立運動」『내앞(천전) 500년』, 기념논문집간행위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