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人

독립운동가

  • 안동人
  • 독립운동가
육사이원록
  • 한글명 : 육사 이원록
  • 한자명 : 李源祿
  • 호 : 육사(陸史)
  • 출생지 : 안동
  • 본관 : 진성
  • 나이 : 40
  • 생년 : 1904
  • 몰년 : 1944
연보
년도 내용
1909년(7세) 조부 치헌 이중직(痴軒 李中稙)에게서 소학 배우기 시작.
1916년(12세) 조부 별세 후 가세가 기울기 시작. 한문학 수학. 이 무렵 보문의숙에서 수학.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 둠버리로 이사.
1919년(15세) 도산공립보통학교(보문의숙을 공립으로 개편) 1회 졸업.
1920년(16세) 부모를 비롯한 가족 모두 대구(남산동62번지)로 이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에게서 그림을 배우다. 동생 원일(源一)은 글씨를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1921년(17세) 영천군 화북면 오동(梧洞) 안용락(安庸洛)의 딸 일양(一陽)과 결혼,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1921 설립)에서 수학(보습과 과정 - 1922년까지).
1923년(19세) 백학학원에서 교편 잡음(9개월 동안).
1924년(20세) 4월 학기에 맞추어 일본 유학.
경찰기록 - 토교쇼오소쿠(東京正則)예비학교, 니뽄(日本)대학전문부,
검찰신문조서 - 킨죠우(錦城)고등예비학교 1년간 재학.
1925년(21세) 1월에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 이정기·조재만 등과 어울리며 베이징 나들이.
1926년(22세) 베이징에서 수학, 광뚱성 광저우 쭝산대학(中山大學)에서 후학기 수학(이활(李活) 이름 사용).
1927년(23세) 쭝산대학에서 전학기를 다니다가 여름에 귀국, '장진홍의거(10월 18일)'에 연루되어 구속됨.
1929년(25세) 5월에 석방(12월에 무혐의로 종결). 중외일보 기자.
1930년(26세) 1월 3일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이활), 아들 동윤(東胤) 태어나다.(만 2세에 사망) 10월 별건곤(別乾坤)에 이활(李活)·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발표.
1931년(27세) 1월에 대구격문사건으로 구속, 3월 석방. 잦은 만주 나들이, 3개월 머물다 연말에 귀국. 8월 조선일보사로 전근, 대구지국 근무.
1932년(28세) 베이징, 텐진에 머뭄.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이동하고, 10월 10일에 난징 근교 탕산에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學員)으로 입교.
1933년(29세) 4월 20일 1기생으로 졸업(26명). 졸업식에 연극 공연. 5월에 상하이로 이동, 6월에 상하이에서 뤼신(魯迅) 만남. 7월에 서울로 잠입.
1934년(30세) 4월에 대중(大衆) 창간호에 평문 자연과학(自然科學)과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 게재.
3월 22일 군사간부학교 출신임이 드러나 구속됨(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이 자수한 후 졸업생 연이어 검거됨),
6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8월 기소유예 확정), 시사평론 다시 집필 시작.
1935년(31세) 정인보의 집에서 신석초를 만나 친교를 다지다.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기 기념 여유당전서 간행에 참여.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 본격적으로 시(詩) 발표.
1936년(32세) 7월 동해 송도원(포항 소재)에서 휴양.
1937년(33세) 서울 명륜동에서 거주, 평문 성격 바뀜(시사에서 문학으로).
1938년(34세) 신석초·최용·이명룡 등과 경주 여행.
가을에 신석초와 부여 관람. 11월 부친 회갑연.
1939년(35세) 종암동 이사. 청포도(靑葡萄) 발표.
1940년(36세) 시 절정, 광인의 태양 등 발표.
1941년(37세) 2월 딸 옥비(沃非) 나다.
폐질환으로 성모병원 입원. 부친상.
1942년(38세) 2월 성모병원 퇴원.
모친과 형님이 별세하여 원촌 큰집으로 귀향.
7월 신인사지(神印寺址) 옥룡암(玉龍庵)에서 요양, 서울 수유리 거주.
1943년(39세) 1월 신정에 석초에게 베이징행 밝힘.
한글 사용을 규제 받자 한시(漢詩)만 발표.
4월에 베이징으로 감.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 세움.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헸다가 늦가을에 피검 되었다.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40세) 1월 16일 새벽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에 의해 시신이 거두어져 장례가 치러졌다.
원창에게 유골이 인계되어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
1946년 1월 16일 인천 송현동(松峴洞) 동생 원창의 집에서 대상을 지내고 집안이 모인 자리에서 원창의 셋째아들 동박(東博)을 후사(後嗣)로 결정하다.
같은 해 10월 20일 여러 지면에 흩어진 시고(詩稿)와 유고 등 20편의 작품을 모은 육사시집(陸史詩集)을 서울 출판사에서 발간하다.
1956년 4월 10일 서울 범조사에서 미발표 유고로 발표된 「편복」과 수필 「산사기(山寺記)」를 추가한 육사시집을 다시 간행하다.
1957년 가을 대구 한양 다실에서 <육사 추도의 밤>을 가지다.
이 때의 행사로는 조지훈의 「육사의 민족 운동」, 김종길의 「육사의 시」등의 강연과 박양균의 추도시「초인(超人)에의 노래」낭독 등이 있었다.
1960년 봄에 유해를 고향 원촌으로 이장하다.
1964년 음력 4월 초 4일 환갑을 맞아 장조카 동영(東英)이 시비 건립 운동을 펴서 신석초(申石艸), 이효상(李孝祥),조지훈(趙芝熏) 등의 협조를 얻어 이육사 선생 기념비 건립 위원회를 조직하고, 시집을 청포도라 개제하여 서울 범조사에서 9월 15일자로 다시 발간하다.
8월 16일 안동에서 육사 시비 건립 기념 강연회를 가지다.
이 해 가을에 딸 옥비(沃非)가 경산 사람 양진호(梁振鎬)에게 출가하다.
1968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안동 낙동강 가에 육사 시비(詩碑)가 제막되다. 그 전날 추모의 밤이 경안극장에서 열리고, 또 추모 강연회(연사 : 노산 이은상)가 안동예식장에서 각각 성황을 이루다. 시비 전면에는?광야를 새기고 비문을 조지훈(趙芝熏)이 짓다.
그리고 전면 글씨는 김충현(金忠顯)이 쓰고 뒷면 글씨는 배길기(裵吉基)가 쓰다.
1974년 미발표 유고 바다의 마음과 난초 그림 두 폭이 새로이 발굴되다.
이것은 육사가 직접 신석초(申石艸)에게 준 것으로서, 그동안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다가 나라사랑 16집 특집을 계기로 처음으로 찾아낸 것이다.
몇편의 한시(漢詩)도 석초가 등초해 두었던 것이다. 작품의 연대는 1937년 자오선(子午線) 동인(同人) 때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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