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보로 양은사동정에 선임.
이어서 대정, 태사부견룡과 산원겸식목록사, 별장과 랑장감찰어사 등을 역임.
1247년(34세)
몽고병이 침공함. 서북면 병마판관에 피명. 북계에 들어가서 위도에서 난민을 도움.
1265년(54세)
1월에 광평공 순과 함께 진봉사로 원에 가서 5월에 돌아옴.
1268년(57세)
2월에 상장군 전분의 무고로 인해 남경수로 좌천, 3일만에 판례빈성사 서북면병마어사와
내각으로 형부상서 추밀원부사에 승진.
1269년(58세)
9월에 원경까지 가서 토역군을 청함.
12월에 동지추밀원사어사대부를 배명함.
1270년(59세)
1월 몽장 몽가독군과 같이 서경(평양)에 머물면서 몽고군의 대동강 도하를 저지시킴.
행궁에 가서 왕을 배알함.
5월 강도에서 개경으로 환도, 이 때 삼별초가 반란함.
9월 전하도 추토사를 피명하여 몽고장군 아해와 더불어 진도의 삼별초를 침.
1271년(60세)
5월 혼도, 홍다구와 더불어 진도의 삼별초를 섬멸함.
통정이 삼별초의 여중을 거느리고 제주에 들어감.
1272년(61세)
4월 탐라(제주)의 삼별초를 완전히 섬멸하고 6월에 개환하다.
1273년(62세)
1월 문하시랑에 승하고 판추토사가 되다.
2월에 중군행영병마원수가 되어 제주의 삼별초를 섬멸하다.
7월 원나라 황제 세조의 소환으로 원나라에 가서 금안, 채복, 금, 은, 전을 상으로 받다.
세조로 부터 개부의 동삼사에 배명되다.
1274년(63세)
1월 동남도 도독사로서 홍다구와 함께 일본 정벌에 필요한 전함축조를 감독하다. 7월 정동선봉별초를 거느리고 신왕을 계행하다.
10월 중군을 거느리고 일본정벌의 장도에 오르다.
12월에 일본에서 돌아옴, 포로 남여 200명을 바침.
1275년(64세)
1월 원나라에 가다. 첨의 중찬이 되다.
7월 성절사로 다시 원나라에 가서 호두금패를 받음.
1277년(66세)
세자사에 피명.
10월에 판전리사사, 상장군, 판감찰사사와 판전리사사가 됨.
11월 위득유 노진의 등으로부터 모반의 무고를 받음.
1278년(67세)
2월 대청도에 유배되고 둘째아들 흔은 백령도에 유배됨.
4월 위득유 등 원고와 함께 원나라로 들어감.
10월 첨의중찬 상장군 판사철사사가 되고 은 10근이 하사 됨.
1279년(68세)
세자사가 됨.
셋째아들 순이 문과 급제함.
1280년(69세)
7월, 10월, 11월의 3차에 걸쳐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왕이 불허함.
박구, 김주정과 함께 동정군사를 사열함.
1281년(70세)
3월 2차 일본정벌에 오름. 합포에 도착.
5월 합포출발.
6월 대마도 등지에서 크게 승리함.
8월 태풍으로 인해 돌아옴.
1282년(71세)
1월 원제가 정동행중서성을 폐지함.
1283년(72세)
12월 퇴직을 청하자, 왕이 추충 정란정원공신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 사사 세자사로 치사함.
1285년(73세)
상락군 개국공을 수봉하고 식읍 1천호, 식실봉 300호를 받았다.
1286년(74세)
안동에 가서 선조의 묘에 성묘를 하다.
1300년(89세)
8월 16일 백목동 로계리에서 별세, 유언에 따라 안동의 조묘 근처에 장사하다.
1307년
선충 협모 정란 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에 추증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다.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우다.
고려말 려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총사령관
김방경(1212~1300년)은 려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총사령관으로 일본정벌에 참여했던 고려말의 인물이다. 자(字)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1212년(고려 강종 1년)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회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208년 문과에 급제, 병부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한 김효인(金孝印)이며, 어머니는 낭장(郎將) 송기(宋耆)의 딸이다.
《고려사》제104권, 열전 제17조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구름이 안개를 먹는 태몽을 자주 꾸어, “나의 입과 코에는 항상 운기(雲氣)가 남아있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神仙)중에서 점지한 것이다"라고
하여, 그의 비범성을 예견하였다. 그는 조부(祖父)의 집에서 양육되었는데, 유년시절 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고 전한다.
그는 1227년(고종 14), 음보(蔭補)로 관직을 시작하여 여러 직을 거친 후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고, 1247년(고종 34)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에 임명되어 몽고의 4차 침입을 맞아
항전하였다. 1263년(원종 4) 어사대지사(御史臺知事)로 승진하였으며, 1268년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일시 좌천되었으나 다시 서북면병마사,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1269년(원종 10)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259년 몽고와의 강화를 계기로 강화도에서 항전하던 무인세력이 붕괴되고, 왕정복고 세력에 의해 개경으로의 환도가 결정된 1270년(원종 11) 6월, 배중손(裵仲孫) 등이 이끄는 삼별초(三別抄)의 항쟁이
폭발했다. 이에 김방경은 1971년 몽골군과 함께 삼별초의 세거지인 진도를 함락시키고, 이 공로로 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다. 이어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에
임명되어, 탐라로 들어간 삼별초의 잔여세력을 평정하라는 임무를 띠고 원나라 장수 혼도,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삼별초를 완전히 토벌하였다. 그는 이 공로로 고려시대 최고의 관직인 시중에 올랐고, 그 해 가을
원나라의 세조(世祖)에게 금안등을 하사받고 돌아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더 받았다.
고려를 간접 지배하에 넣은데 성공한 몽고는 일본 정벌을 계획했다. 그로인해 려몽연합군이 조직되었으며, 1274년 10월 제 1차, 1281년 5월 제 2차 일본원정이 감행되었다. 이 당시 김방경은 각각
중군장(1274)과 고려군도원수(1281)로서 전쟁에 임하였으나 두 번 다 실패하였다.
김방경이 일본 정벌 실패 후 돌아와 벼슬을 사양하자, 고려왕실은 1283년 그를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 삼중대광첨의중찬전리사판사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를 치사하였으며,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을 가직하고 또 상락군개국공 식읍일천호식실봉삼백호(上洛郡開國公, 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를 봉하였다. 이와 함께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는 1286년에 8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고려사》열전은 “김방경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후하였으며 도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들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아들, 조카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예의에 맞게 언동을 취하였으며 옛 예식을 많이 알았으므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차질이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사후인 충선왕(忠宣王) 때 다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증되었다.
그의 묘소는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33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에는 충렬공 김방경 유허비(高麗忠烈王金方慶遺墟碑)가 남아있다. 1661년 그를 추모하기 위해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에
창건되었던 물계서원(勿溪書院)은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물계서원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에 있었던 서원. 1661년(현종 2)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방경(金方慶), 김구용(金九容), 김양진(金揚震), 김응조(金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 강당, 동재, 서재, 전사청(典祀廳), 신문(神門), 정문, 주사(廚舍) 등이 있었으며, 봄, 가을에 향사
향사 : 서원에서 공자등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를 말한다. 를 지내왔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였다.
충렬공 김방경 유허비
고려 충렬공 김방경 유허비는 높이 165cm, 폭 65cm, 두께 28cm로 1825년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인조 13년(1635)에 유허비가 실석된 것을 비로소
발견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훨씬 그 이전에 세워진 것은 알 수 있으나 그 연대와 장소는 미상이다.
숙종 43년(1717)에 관에서 다시 건립할 곳을 선정하였다. 영조 41년(1765)에 관에서 건너편 안산에 다시 비를 세웠고 전면 글씨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썼다. 순조 14년(1814)에 후손들이 협력하여 건너편 안산으로부터 충렬공께서 평소에 소거하시던 초당유허(草堂遺墟) 임좌(壬坐)인 바로 이곳에 이건하였다.
지금도 건너편 안산 밭에는 전에 유허비가 서있던 좌태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옛모습을 방불케하고 있다. 현재 이곳의 유허비 거북좌대는 이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적혀 있다.
【참고문헌】안동시립민속박물관, 1995, [안동의 비석], 201-202쪽.
묘소와 재사
김방경의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33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묘는 높이 2.1m, 둘레 32m의 호석이 있는 봉분과 1966년에 세운 묘비 및 신도비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 묘비는 1602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묘 앞에는 좌우 6기의 망주석과 상석이 있다.
이 묘소는 실전 되어 찾지 못하다가 안동 오천리 광산김씨의 시조 김효노(金孝盧)의 장례를 위해 죽송리 현지점을 파던 도중 '고려 충렬공 김방경지묘'란 지석이 출토되어 묘를
찾았다는 전설이 있다. 구전되는 이야기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광산김씨가 이곳에 묘를 처음 쓰니 회오리 바람이 불고 까막까치가 제물을 먹어 버려 제사를 지낼 수 없어, 그 아래의 이름 없는 봉분이 있어 먼저 이 무덤에 제를 올리니 이
변이 없어졌다. 이 봉분이 상락군의 묘소였다. 이 일이 있고 안동 상락김씨는 실존한 상락군 묘소를 찾게 되었다 한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산소를 쓰고 제사를 지내는데 웬 난데없는 광풍이 몰아치면서 모든 제물이 날아가버렸다. 또 다시 지내려고 해도 또 날아가고 했다. 그래서 우선 위에 있는
산소(충령공의 것)에 먼저 제사를 지내고 나서 광산김씨 제사를 지내니 아무 일도 없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광산김씨 집안에서는 시제 때마다 김방경의 산소에 먼저 제사 올리고 난 후 자신들의 산소에 제를 올린다. 충렬공의 묘에서는 음력 10월 9일에 후손들이
제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