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4일 안동 금계리(춘파)에서 아버지 경당 장흥효와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에 외동딸로 출생.
1608년(11세)
소학[중국 송(宋)나라 때의 수양서, 주자(朱子:朱熹)가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소년들을 학습시켜 교화시킬 수 있는 내용의 서적을 편집하게 하여 주자가 교열, 가필한 것이다. 1185년에 착수하여 2년 뒤 완성하였다. 내·외의 2편으로 되어 있는데, 내편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의 4개 항목을 기본으로 하여 유교의 윤리사상의 요강을 논하였으며,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의 2개 항목 밑에 한(漢)나라 이후 송나라까지의 현철(賢哲)의 언행을 기록하여 내편과 대조시켰다. 봉건제 사회에서의 개인 도덕의 수양서로 특출한 것이다.], 십구사략 등을 스스로 깨우치다.
1610년(13세)
학발시, 경신음, 성인음, 소소음 등을 짓다.
1615년(18세)
어머니가 장질부사로 몸져 눕자 집안일을 맡다.
1616년(19세)
영해 인량리의 재령이씨 운악 이함 선생의 셋째 아들 석계 이시명 선생에게 출가하다.
1622년(25세)
친정 모친 권씨부인 별세.
1631년(34세)
석계종택을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으로 이주.
1633년(36세)
시아버지 별세, 친정 부친 경당 선생 별세.
1642년(45세)
칠남 삼녀를 훌륭히 성장시켰으며, 칠남을 세칭 칠현자로 칭송받도록 했다.
1644년(47세)
성인음, 소소음 수첩(세칭 안릉가 삼절로 일컬어짐), 시어머니 증정부인 진성이씨 별세
1652년(55세)
병자국치를 슬퍼하며 영양군 수비로 이거.
1664년(67세)
신급(벽계 이은), 성급(밀암 이재)에게 학문을 권려하는 오언시를 써주다.
1670년(73세)
‘희우희’를 씀. 그 당시의 넉넉하고 평온했던 심정이 드러난다.
1672년(75세)
조선조 전통음식 요리서인 규곤시의방 저술.
1673년(76세)
안동부 대명동(풍산읍 수곡리)로 이거, 부군 석계 선생 별세(84세).
1680년(83세)
7월 7일 영해부 석보에서 별세.
1689년
8월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로 인해 정부인 교지 받다.
생애
정부인 안동장씨는 임진왜란이 끝나지 않은 1598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의 봄파리 마을에서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아버지 경당 장흥효와 어머니 권씨부인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벼슬과
재산에는 뜻이 없었던 선비인 아버지 장흥효에게 전쟁은 더욱 살림살이를 어렵게 만들었고 이 시기에 정부인 안동장씨가 태어난 것이다.
어린 시절 정부인 안동장씨는 아버지에게 "소학"[중국 송(宋)나라 때의 수양서 - 주자(朱子:朱熹)가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소년들을 학습시켜 교화시킬 수 있는 내용의 서적을
편집하게 하여 주자가 교열, 가필한 것이다. 1185년에 착수하여 2년 뒤 완성하였다. 내·외의 2편으로 되어 있는데, 내편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의 4개 항목을 기본으로 하여
유교의 윤리사상의 요강을 논하였으며,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의 2개 항목 밑에 한(漢)나라 이후 송나라까지의 현철(賢哲)의 언행을 기록하여 내편과 대조시켰다. 봉건제 사회에서의 개인 도덕의 수양서로
특출한 것이다.]과 "십구사략"등을 배웠다. 40대의 아버지 경당 장흥효는 당시 영남사림의 최고의 학자였고, 수많은 학인이 경당에게 배움을 청하였다. 정부인 안동장씨는 이러한 가운데 학문을 틈틈이 배웠으며
특히 학인들이 모르는 부분까지 영특한 소녀인 정부인 안동장씨가 깨우쳐 아버지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어린 시절 정부인 장씨가 남긴 시를 보면 당시 정부인 안동장씨의 깊이 있는 사색을 알게 한다.
소소음(蕭蕭吟)
창외우소소(窓外雨蕭蕭) 창밖 쓸쓸한 비
소소성자연(蕭蕭聲自然) 빗소리 자연스럽게 들리네
아문자연성(我聞自然聲) 자연의 소리에 듣노니
아심역자연(我心亦自然) 내 마음도 자연 되네
19세 때 정부인 안동장씨는 아버지 장흥효의 수제자인 8살 연상의 이시명과 혼인을 치른다. 이시명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김해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사별한 지 2년이 되었고,
슬하에 두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장흥효는 총명한 이시명을 깊이 신뢰하였고, 그의 장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혼인 후 정부인 안동장씨는 이시명이 살고 있는 영해군 나랏골로 간다.
혼인 후 정부인 안동장씨는 전 부인인 김씨 부인의 자녀 1남 1녀 포함하여 모두 7남 3녀를 둔다. 특히 전부인의 자녀에게 성의를 기울여 이들을 혼인시킬 때 어려운 살림에
혼수품을 극진히 마련하여 주변의 칭송을 받았다.
남편과 금술이 좋았고, 임신 후에는 잡스러운 것을 먹지 않고, 과일이나 채소도 제대로 형태를 갖춘 것만 먹는 등 열녀전에 몸가짐을 조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자신이 첫
번째 낳은 둘째아들 휘일과 셋째아들 현일은 영남의 대학자로 칭송받는다.
부인은 늘 자녀에게 글을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늘 엄격하고 문제를 바라볼 때 바로 지적하지 않고 여유와 너그러움을 두고 반성을 하게
하고 차후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훈육하였다.
많은 식구가 있었던 시댁인 재령이씨 뿐만 아니라, 친정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홀로 남은 친정아버지를 돌보았다. 친정아버지가 늦게 장가를 가 새어머니가 오시자 새로운 집에 잘
적응시키기 위하여 친정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하였다. 이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새어머니와 자신의 동생을 영해로 데리고 와서 혼인할 때까지 돌봐주었다.
결국, 친정인 안동장씨와 시댁인 재령이씨 두 집안의 혼사와 가례 등을 돌보고, 두 집안 모두를 훌륭한 가문으로 만든 것이다.
정부인 안동장씨는 퇴계의 학통을 잇는 학봉 김성일 - 경당 장흥효 - (석계 이시명) - 갈암 이현일 - 밀암 이재로 이어지는 중심에 있었던 여성이었다. 말하자면 경장 장흥효를
아버지로, 석계 이시명을 남편으로 갈암 이현일을 아들로 둔 딸이자 부인이자 어머니였다.
조선 후기 여성은 성리학적 인성론으로 말미암아 여성은 편벽한 성격을 가졌다는 편성론이 일반화되었다. 내외구분이 심화하여 남자는 정치사회활동에, 여성은 가사와 직조, 육아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그럼에도 농사와 같은 생산 활동은 남녀가 공동으로 부담하게 됨으로써 여성에게 사회적 부담이 편중된다.?17세기를 살다간 정부인 안동장씨는 이런 어려운 사회적 정황 속에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슬기롭게 이겨나가고 자녀교육을 충실하게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남편인 이시명은 처사로써 사회적 공명에 힘쓰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다지는 선비의 길을 택하여 매진하고 정부인 안동장씨는 현명한 몸가짐과 성실하고 애정어린 삶의 자세로 남편의 길에
보탬을 준다.
아들인 갈암 이현일은 퇴계학맥을 이어나간다. 정부인 안동장씨의 가르침과 보이지 않은 살핌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아들 이현일은 정부인 안동장씨의 실기를 남기고
그의 어머니를 극히 칭송함을 알 수 있다.
정부인 장씨 필첩
제목 없는 고시(古詩)와 "시생(示甥)" 이란 칠언율시 2편이 친필 초서로 쓰여있다.
정부인 안동장씨실기
정부인 안동장씨의 아들인 갈암 이현일이 작성한 정부인 안동장씨에 대한 글을 묶은 책이다.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이것은 정부인 안동장씨의 음식관련 서적이다. 표지에는 규곤시의방(閨?是議方)으로 쓰여있고 첫머리에는 음식디미방이라 제목하고 궁체의 붓글씨로 기록되어 있다. 1670년경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며느리나 시집갈 딸에게 주기 위하여 정리하였다고 한다. 내용에는 자신의 종가뿐만 아니라 ‘맛질방문’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이웃마을의 요리도 기록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랜
음식관련 서적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학발첩
가로 25.5cm, 세로 44cm로 10세 전후에 지었다는 학발시가 친필 초서로 쓰여있다. 18세기 학지 간옹 이헌경으로부터 필적이 정묘하다는 평을 들었다.
호랑이 그림 한 폭
정부인 장씨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호랑이 그림이다.
석계선생 고택
남편 석계 이시명과 정부인 안동장씨가 영해 나라골에서 나온 1640년 이후부터 거처한 고택이며 임종을 여기서 맞이하였다고 전해진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91호이며 영양군 석보면 원리에 있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이 고택은 일자형 사랑채와 안채는 토담으로 막았다. 사랑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두었으며 좌측에는 마구와 고방을 설치하였다. 사랑마루 주위에는 판벽을 두어 마루방으로 꾸몄으며 감실을 설치하였다.
광풍정, 제월대
현재 정부인 안동장씨가 태어난 집은 보전되지 않고 다만 그의 아버지 경당 장흥효와 문인들이 모임을 가졌던 광풍정이 있으며 제월대에는 후인들이 최근 건물을 지었다.
석천서당
남편 석계 이시명과 항재 이숭일의 유적지에 세운 서당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현재 “정부인안동장씨실기” “석계선생문집” 등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