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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 지정번호 : 사적 제260호
  • 지정연도 : 1978년 3월 31일
  • 소재지 :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동
  • 시 대 : 조선시대
  • 분 류 : 서원
병산서원의 유래

병산서원은 다른 서원과 다르게 서당에서 서원으로 변신한 역사적인 서원이다.
병산서원의 시초는 풍악서당이다. 풍악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이 지역을 풍악현이라고 하는데서 비롯되었다. 풍악현의 중심은 지금의 풍산읍이었다.
병산서원은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 상류에 자리를 잡아 그 수려함이 남다르다.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하회리에서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한다. 낙동강 줄기와 만나 산등성이를 돌아 돌아가는 서정성 짙은 길은 일찍부터 시인들과 학자들 사이에 유명한 산보 길로 알려져 있다.

병산서원은 가까운 하회마을과는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다. 병산서원이 위치한 마을인 병산은 하회마을과 함께 병산탈춤이 유명한 마을이기도 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하회탈은 모두 11점인데 이중 2점이 병산탈이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병산서원은 가깝게 낙동강과 모래사장 그리고 작고 아담하지만 예기를 갖고 있는 병산을 정원으로 하고 있다. 서원의 만대루나 존덕사에서 내려다보이는 낙동강의 유유한 흐름에서 병산서원이 자연과 더불어 학문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하는 최적으로 조건을 구비한 서원임을 알게 한다.


병산서원의 역사는 고려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 행정구역으로 풍산현이었던 이곳에 인근의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는 풍악서당(風嶽書堂)이 있었다.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1361년 겨울 안동에 온 공민왕이 마침 이곳을 지나게 되었고, 풍악서당에서 나라의 어려운 일을 당하였지만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음을 보고 매우 감동하여 풍악서당에 책과 토지를 주어 장학을 권장하였다. 현재 예천군 감천면 일대 병산교육재단의 소유로 되어있는 토지와 임야가 당시 공민왕이 풍악서당에 하사한 땅이다.


이후 풍악서당은 풍산현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초기가 지나면서 풍산현이 보다 큰 고을로 발전하였고, 풍악서당이 위치한 곳도 많은 집이 들어서면서 학문을 연마하기에 부족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지역의 유림들은 풍악서당을 옮기기로 결정하였고, 마침 퇴계의 제자이자 조선시대 명재상인 서애 유성룡이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 하회마을에 있었기에 풍악서당을 옮기는 일에 관계한다. 서애는 풍악서당이 다시 자리를 잡을 좋은 위치를 찾았고, 마침내 자연경관이 수려하면서도 조용히 학문의 매진할 수 있는 현 병산서원의 위치로 서당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름도 지명을 따라 병산서당이라 고쳐서 부르게 되었다.


서애와 병산서당의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이후 서애는 병산서당에 애정을 가지게 되었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병산서당은 이후 병산서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러나 그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서애의 문집 별집 1권에 “병산서원봉별 김학봉환조이수 屛山書院奉別 金鶴峯還朝二首”라는 시가 있으며 이호민에게 보내 편지글에 ‘병산서원에서 퇴계 문집을 편집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어 서애 유성룡이 살아있을 때 이미 병산서원으로 불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동서재(건물의 좌우에 있는 기숙사 겸 공부방)가 있을 경우 서원으로 부르는 관행이 당시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병산서원 역시 병산으로 이동하여 새롭게 건물을 지을 때 동서재를 함께 건축하였다면 병산서원으로 불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607년 서애 유성룡이 죽고 6년 후인 1613년에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 김윤안(金允安) 등의 문인들과 유림들이 서원 안에 존덕사(尊德祠)를 세우고 위패를 모시면서 본격적인 서원으로 기능을 가지게 된다. 1662년에 서애 유성룡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유진(柳袗) 선생을 선생의 위패 옆에 배향(配享-함께 모심)하였다. 병산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의 서원 사당 중 하나이다.


서원은 학문을 연마하는 기능과 선현을 추모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병산서원의 경우 입교당은 학문을 연마하는 중심이며, 존덕사는 선현을 추모하는 기능을 가진 건물이다. 현재 존덕사에는 서애 유성룡과 수암 류진 두 분을 모시고 봄과 가을에 각각 제사를 드리고 있다.


*서애 유성룡은 1542년 경북 의성의 사촌에서(서애의 외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입암(立巖) 유중영(柳仲?)이다. 1555년 14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1558년 17세에 전주 이씨를 맞이하여 혼인하였다. 1562년에 퇴계의 문하가 되었으며 23세에 생원회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26세에 예문관검열 및 춘추관기사관에 임명되고 28세에 성균관 전적, 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29세에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다. (추가 * 수암은 서애의 증손자이다. 일찍부터 안동지역에 그 이름을 떨쳤으며 특히 문서체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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