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휴정의 유래
정자는 자연 속에 있다. 자연과 인간 그 영역에 대한 구분을 없애고 자연인으로써 수양하는 인간의 자세를 정자 속에 담아내고자 하기 때문이다.공부를 하기 위하여 정자를 건립하는 경우도 많다. 많은 시판과 함께 공부하는 방이 설계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자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유학의 전통이 확립된 안동에 정자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현재 조사 보고된 것만 하여도 250여개를 넘어서고 있으며 집안에 들여놓은 정자를 포함하면 이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만휴정은 보백당 김계행이 안동시 풍산읍 소산동에서 길안면 묵계로 집을 옮기면서 건립하였다. 중건기에는 김계행이 벼슬에 염증을 느끼고 물러나 그의 나의 71세 되던 때인 1501년경에 만휴정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만휴정(晩休亭)이란 이름에서 보이듯 그는 느즈막히 쉴 수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이곳에 정자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만휴정을 건립한 보백당 김계행은 조선초 청백리에 뽑혔던 분으로 1431년 안동시 풍산읍 소산에서 태어났다. 148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고령현감 부수찬 등을 지냈고, 연산군 때 대사관으로 척신들의 잘못을 논박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때 투옥되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다시 돌아와 소산에서 떠나 길안 묵계에 만휴정 등을 짓고 은거하였다.
건축
만휴정은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으로 흐르는 계곡물 옆에 위치하고 있다. 반변천까지 약 200m 정도이며 많은 정자들이 강을 끼고 있는 것에 비하여 계곡물 옆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은거를 결심한 김계행의 신념과 정자를 지은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계곡에 자리잡은 만휴정은, 계곡물의 맑음과 수려함이 돋보이지만 반면 전면에 바로 마주하여 산등성이가 있어, 바라보는 전경이 밋밋한 면이 있다. 그래서 만휴정은 전면 산등성이를 송암이라 이름하여 마음속의 전경으로 그 약점을 달래고 있다. 눈앞의 경치가 아닌 마음의 경치를 보라는 뜻이련가.
만휴정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개울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정자공간으로 진입한다. 낮은 담은 산과 개울과 경계를 두지 않으려는 배려인 것으로 보인다. 문을 들어 정자 공간에 들어서면 건물 뒤편에 정자로 오르는 문이 있다. 경관을 헤치지 않겠다는 고심이 느껴지는 동선(動線) 배치이다.
만휴정은 안동지역 정자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에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 옆칸을 방으로 만들었다. 이는 마을과 일정하게 떨어져 있어 숙식도 가능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측면은 두 칸이다. 앞 한 칸은 마루를 두었다. 마루 외곽으로는 계자난간을 두르고 개울과 송암을 마주보고 있다.
익공양식이지만 기둥과 도리의 간격을 크게 하기 위하여 화반을 둘렀으며 누마루 형식을 기둥으로 기단부를 만들어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을 준다.
정자 내부에는 다양한 현판, 시판이 걸려있어 만휴정의 풍류를 알게 한다. 특히 김계행의 대표적인 유훈인 “청백만이 우리집의 보물”이라는 글귀는 너무나도 유명한 김계행의 대표적인 문구이다.
기타
현판 만휴정(晩休亭)
정자의 이름을 만휴정(晩休亭)이다,
“느즈막히 쉬는 곳”이란 뜻으로 정자를 건립한 보백당 김계행이 벼슬을 물리고 이곳에 은거하고 싶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보백당 김계행선생 유훈 1
吾家無寶物 寶物有淸白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다네 보물은 오직 청백한 몸과 마음이라네
보백당 김계행 선생이 유훈으로 남긴 명언이 작은 현판으로 만들어져 만휴정 좌우 기둥에 걸려있다.
보백당 김계행선생 유훈 2
持身謹愼 待人忠厚
자신을 가꾸기 위해서는 말을 삼가하며 마음 씀씀이를 신중하게 하며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믿음(충)을 두텁게 하라
암각서
정자에서 정면으로 바라다보는 바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란 큰 글씨를 새겨 놓았다.
송암폭포
만휴정의 용추에 있는 폭포이다. 송암동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다리
용추와 호담 사이의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만휴정에 이른다.
화장실
용추와호담
만휴정 아래에 있는 여울이다. 아래와 위 2단으로 되어 있어서 호로병처럼 보이는데 폭포를 이루고 있다.
정문
험상궂은 바위산을 등지고 계곡을 향해 동향으로 앉은 정자 앞엔 현재 자그마한 문과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으나, 당초에는 계곡의 풍광을 더욱 즐기기 위해 담장을 설치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