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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십도란?
이름 : 성학십도
성학십도란?
성학십도 聖學十圖 - 그림으로 보는 성인의 학문

퇴계 이황선생이 68세의 노숙한 나이에 저술한 『성학십도』는 말 그대로 성인의 학문, 즉 유학을 10장의 그림에 압축시켜 놓은 도형 해설집이다. 이 책은 중국 북송과 남송 시대 성리학자들의 주요한 저술을 그림으로 그리고 해설을 붙인 것들을 모아 소개하고, 퇴계 자신의 견해를 붙이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는데, 분량이 매우 짧다. 『성학십도』라고 부르는 퇴계의 이 저술은 제일 앞에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 곧 ‘성학십도를 올리는 상소문, 그림 첨부’라는 글이 달려 있다. 전체는 이 상소문 부분과 열 개의 그림을 제시하고 해설한 십도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우선, 서문에 해당하는 진성학십도차에 따르면, 퇴계는 도를 깨달아 성인이 되는 요령과 근본을 바로잡아 나라를 경륜하는 근원이 모두 이 <<성학십도>>에 갖춰져 있다고 하고, 옛 성현들의 모든 주장은 마음을 보존하고 품성을 기르는 자료가 되며, 임금의 정치철학이나 정치력의 확립에 기여하는 것이라 여겨 상소를 올렸다.


다음으로, 본론격인 십도 부분의 열 개의 그림과 해설의 대체적인 내용을 소개하면, 성리학의 형이상학에서 근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태극을 설명한 ‘태극도’, 그리고 만물과 일체가 되는 것이 인(仁)이라는 내용의 ‘서명도’, 일상생활에서의 행동양식과 몸가짐 등을 제시한 ‘소학도’를 배치하고, 마음을 수양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목표를 둔 ‘대학도’를 뒀다. 다섯 번째는 소학과 대학에서 무엇을 어떤 식으로 배워야 하는지에 관해 주자의 백록동규를 이끌어 설명한 ‘백록동규도’가 이어지고, 그 다음에는 마음이 품성이나 감정과 어떤 연관을 갖는지 설명하는 ‘심통성정도’를 둬 마음의 수양이 공부의 대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인설도’에서는 인을 자연의 원리로까지 능동성을 강조하고, ‘심학도’에서는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공부를 제시하며, 마지막으로 ‘경재잠도’와 ‘숙흥야매잠도’를 배치해 언제나 어디서나 경(敬)으로 일관해야 한다는 점을 잠언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성학십도를 올리는 상소
進聖學十圖箚, 幷圖

판중추부사 신 이황은 삼가 두 번 절하고 임금님께 말씀을 올립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는 형상이 없고 하늘은 말이 없습니다. 하도낙서(河圖洛書) 1) 가 나옴으로부터 그것에 바탕을 두어 괘(卦)와 효(爻) 2) 를 만드셔서 도가 비로소 천하에 밝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도는 넓고 넓어서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를 알 수 없으며 옛 성현의 말씀은 너무도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릅니다.

성인의 학문(聖學)에는 큰 원리가 있으며 심법(心法) 3) 에 그 요체가 있습니다. 후세 현인들은 부득이 그림으로 그것을 그려서 들어내 보이고, 그 뜻을 설명해 줌으로써 사람들에게 도(道)로 들어가는 문과 덕을 쌓는 기틀을 보여주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임금의 한 마음은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근원이요 모든 일의 책임이 모아지는 곳이며 뭇 욕심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여러 가지 사악한 것이 번갈아 침범하는 곳입니다. 한 번 게을리 하고 소홀히 하여 방종이 이어지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진동하는 것과 같아서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성스러운 임금들과 명철한 임금들은 이것을 근심하여 두려워하고 삼가며 조심하고 신중히 하기를 날마다 해도 오히려 미진하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사부(師傅) 4) 의 관직을 두고 굳게 간하는 직책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는 의(疑), 뒤에는 승(丞), 왼 쪽에는 보(輔), 바른 쪽에는 필(弼) 5) 을 두었습니다. 수레를 탈 때에는 여분(旅賁) 6) 의 직책이 있었고, 조회를 받는 자리에는 관사(官師) 7) 의 법이 있었으며, 궤석(机席)에 기대어 있을 때에는 훈송(訓誦) 8) 의 간함이, 잘 때에는 설어(?御) 9) 의 잠언이, 일에 임해서는 고사(?史) 10) 의 인도가, 한가 하게 있을 때에는 공사(工師) 11) 의 송(誦)이 있었고, 소반과 밥그릇 안석과 지팡이 장도 대금 문과 들창에 이르기까지 무릇 눈길이 닿는 곳과 몸이 있는 곳에는 감(鑑)과 계(戒)가 없는 곳이 없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유지하고 그 몸을 지키는 조치가 이와 같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덕은 날로 새로워지고 업적은 날마다 퍼져 조그마한 허물도 없이 명성이 높아졌던 것입니다.

뒷세상에 백성의 임금 된 자도 천명(天命)을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 책임이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스스로를 다스리는 방법은 하나도 이와 같이 엄격한 것이 없고 거리낌 없이 스스로 성인인 체 거만하며 왕공(王公)들의 높임과 백성들의 추대에 오만하고 방자하여 마침내는 흩어지고 망하게 되었으니 무엇이 이상하다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신하가 되어서 올바른 도리로 임금을 인도하고자 하는 사람은 진실로 그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구령(張九齡)이 금감록(金鑑錄) 12) 을 바치고 송경(宋璟)이 무일도(無逸圖) 13) 를 바치고 이덕유(李德裕)가 단의육잠(丹?六箴) 14) 을, 진덕수(眞德秀)가 빈풍칠월도(?豊七月圖) 15) 를 바친 것과 같은 것은 그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간곡한 충정과 선을 베풀고 가르침을 드리고자 하는 간절하고 지극한 뜻이니 사람의 임금이 되어 깊이 생각하여 받들어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지극히 어리석고 고루하오나 여러 조(朝)에 걸쳐 은혜를 입었사온데 병들어 쓸모없이 되어 시골에서 초목과 더불어 썩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헛된 이름이 잘못 전해져서 경연(經筵)의 중책을 맡으라고 불러 주시니 두렵고 떨려서 사양하고자 했으나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기왕에 면치 못하고 이 자리를 더럽혔으므로 성학을 전하여 인도하고 임금의 덕을 돕고 기름으로써 요순시대 16) 처럼 융성하게 해야 하는데, 이는 제 힘으로 미치지 못하는 일이라 사양하려 해도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은 학문이 거칠고 말솜씨가 서투른데다가 나쁜 병마저 잇달아 앓게 되어서 들어가 시강도 거의 하지 못하다가 겨울부터는 전폐하기에 이르렀으니 신의 죄 만 번 죽어 마땅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온데 당초 글을 올려서 학문을 논한 말씀이 이미 임금님의 뜻을 감동시켜 드리지 못하고 그 뒤 올라가 뵙고 여러 번 드린 말씀도 임금님의 지혜에 보탬이 되지 못하였으니 보잘것없는 신의 간절한 생각으로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직 옛 현인 군자들이 성학을 밝히고 심법을 터득하여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붙여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 방법과 덕을 쌓는 기초를 가르쳐 준 것이 세상에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에 감히 그것을 빌어서 임금님께 나아가 진술하여 옛 제왕들의 공송(工誦; 악공 중 시편을 외워서 임금께 들려주는 것), 기명(器銘; 임금이 일상적으로 쓰는 그릇에 새겨 반성하고 조심하게 함)에 끼친 뜻을 대신하고자 하오니, 대체로 옛 것의 도움을 받아 장래에 이로움이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옛 것 중에서 삼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려 뽑은 것이 7개입니다. 그 중에서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17) 는 정임은(程林隱) 18) 의 그림(圖)을 토대로 신이 만든 두 가지 작은 도를 덧붙였고, 그 밖의 세 가지 그림은 비록 신이 만들었으나 그 글과 뜻과 조목과 배열은 모두 옛 성현들께서 풀이한 것이며 신이 새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이것들을 합하여 성학십도를 만들고 각 그림 밑에는 외람 되게 저의 보잘것 없는 설(說)을 붙여서 삼가 꾸며 올립니다.


그러하오나 신이 병중의 몸으로 이것을 하려 하니 눈이 어둡고 손이 떨려 글씨가 단정하지 못하고 줄의 배열과 글자의 고르기가 모두 규격에 맞지 않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바라옵건대 이 글을 경연관 19) 에게 내리시어 자세히 따져서 틀린 곳은 고치고 다시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정본(正本)을 깨끗이 쓰게 하여 해당 부서에 맡겨 병풍 한 벌을 만들게 하셔서 한가롭게 계시는 곳에 펼쳐 두십시오. 또 다른 작은 접책을 만들어 늘 책상 위에 두시고 바라옵건대 기거동작하실 때에 언제나 보고 살피셔서 경계하신다면 저의 간절한 충정의 뜻으로 여기신다면 다행하기 이를 데 없겠나이다.


그리고 그 뜻이 미진한 곳이 있어서 신이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찍이 듣기를 맹자의 말에 "마음의 하는 바는 생각함이며 생각하면 생각한 바를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지 못한다" 20) 고 하였습니다. 기자가 무왕을 위하여 홍범 21) 에 관하여 말할 때 "생각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은 대상을 깊숙이 꿰뚫어 보는 힘이 있다는 것이고 이 힘은 인간을 성인으로 만든다" 22) 고 했습니다. 대체로 마음은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고 23) 지극히 비고 신령합니다. 이치는 그림과 글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뚜렷하고 알찹니다.


지극히 비고 지극히 신령한 마음으로 지극히 뚜렷하고 지극히 알찬 이치를 구하니 마땅히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면 생각한 바를 얻고 깊숙이 꿰뚫어 보는 힘은 성인을 만든다고 하였으니 어찌 오늘이라고 그런 징험이 나타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비고 신령해도 주재하는 것이 없으면 일이 앞에 닥쳐도 생각하지 못하고, 이치가 뚜렷하고 알차더라도 밝히고 깨닫는 것이 없으면 늘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림을 보고 철저하게 생각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또 들으니 공자께서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 24) 고 하셨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그 일을 익히고 또 익혀 제대로 그것을 실천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개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이 학문은 마음에서 구하지 않으면 어두워 얻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생각해서 작은데 이르기까지 통달해야 합니다. 그 일을 익히지 않으면 위태롭고 불안합니다. 따라서 배우고 또 배워서 반드시 그 알찬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생각과 배움은 서로 도와 발전하게 하고 서로 도와 이익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임금님께서는 이런 이치를 깊이 살피시고 먼저 뜻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순(舜)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면서 노력하시면 그렇게 됩니다. 이것들을 배우고 생각하는 것에 힘써 적용해 보십시오. 마음속에 경(敬)의 태도를 지닌다는 것은 생각과 배움을 함께 하고 동정(動靜)을 일관하고 안과 밖이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로 되게 하며 드러남과 드러나지 않음을 하나로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경(敬)의 태도를 유지하는 방법은 반드시 삼가고 엄숙히 하고 힘써 마음을 집중하는 데에 두고,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이치를 탐구하는 것입니다. 남이 보지 않고 듣지 않아도 삼가고 두려워하는 자는 더욱 엄숙하게 되어 더욱 경(敬)의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은밀히 혼자 있는 곳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살피는 자는 더욱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지니게 됩니다. 하나의 그림을 두고 생각하면 이 그림에 마음을 집중해서 다른 그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해야 하고 한 가지 일을 익히려면 그 일에 전념하여 다른 일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언제나 그렇게 해야 하고 오늘도 내일 도 한결같이 계속해야 합니다. 새벽에 정신이 맑을 때에 그 뜻을 풀어서 참 맛이 날 때까지 되새겨 보기도 하고 혹은 평소 사람들과 응대하실 때에도 몸에 배도록 키워 나가셔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처음에는 부자유스럽고 갈등을 느끼는 어려움이 있으시거나 때로는 몹시 괴롭고 불쾌한 감정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바로 옛 사람들이 말한 “크게 발전할 기미”이며 또한 “좋은 소식의 조짐”이니 절대로 이러한 것들 때문에 스스로 그만두셔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욱 자신을 가지고 더욱 힘써야 합니다.


마침내 진리를 많이 쌓고 오랫동안 힘을 기울이면 자연히 마음과 이(理)가 서로 어울려 서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모든 것을 훤히 꿰뚫어 알게 되고 익힌 것과 일이 익숙하여져서 점점 편하고 순조롭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 그 하나에 전념하면 마침내 모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맹자께서 말씀하신 바이니 “깊이 파고들어 스스로 터득하는 경지” 25) 가 생겨난다면 어찌 그에서 그치지 말고 그로부터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부지런히 힘써 나의 재능을 다하면 그것이 바로 안자(顔子) 26) 의 “인을 어기지 않는 마음” 27) 이며, 나라를 위하는 일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증자 28) 가 말하는 “충서(忠恕)” 29) 로 일관하면 도를 전하는 책임이 그 몸에 있습니다.


외경하는 태도를 지니도록 하는 것은 별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中)과 화(和)의 원리가 완전히 실현될 때 천지는 제자리에 서며 만물은 성장하게 되며 덕행(德行)도 올바른 인간 관계의 문제이지만 이 덕행을 통하여 외경(畏敬)하는 태도가 일상생활 중에서 조금도 떠나지 않으면 중화위육(中和位育) 30) 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 며 덕행이 상륜(常倫; 불변의 윤리)에 벗어나지 않으며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天人合一) 미묘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붙여서 열 폭의 종이 위에 베풀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임금님께서 한가로이 계실 때에 이것을 생각하고 익혀서 공부하시면 성인이 되는 요체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 져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하늘이 보시고 있으며 신령이 보살피는 바 마음을 가다듬으셔서 처음과 끝을 거듭 되풀이하시고 경미하다 하여 소홀히 하지 마시며 귀찮고 번거롭다 하여 버려두지 않으신다면 나라와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저는 야인이 미나리와 따뜻한 햇빛을 임금께 바치고자 하는 정성 31) 으로 전하의 위엄을 모독함을 무릅쓰고 황송하와 숨을 죽이고 가슴을 졸이면서 이것을 바치오니 처분을 기다리옵니다.




1)하도낙서(河圖洛書) : 중국의 복희씨(伏羲氏)는 황하(黃河)에서 나왔다는 말(馬)의 등에 나타난 도형을 하도(河圖)라 하며,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이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영묘한 거북이의 등에 씌여 있었다는 글을 낙서(洛書)라 한다. 그런데 우왕은 낙서를 보고 구주(九疇)를 지었다고 하며 다시 기자(箕子)는 구주를 해설하여 주무왕(周武王)에게 홍범(洪範)을 진술하였다고 전하여진다.


2)괘효(卦爻) : 64개의 괘(卦)를 다각도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주역(周易:易經)이다. 그런데 괘의 구성은 여섯 개의 효(爻)로 되어있다. 각각의 괘는 다양하게 뒤섞인 양효와 음효의 여섯 개의 묶음을 최상한선으로 하였을 때 64개의 괘가 나오는 것이다.


3)심법(心法) : 선량한 마음가짐과 그 실천을 위한 수도(修道)를 말하는 것이다. 송대(宋代)의 유학자(儒學者)들이 특히 강조하여 말하기 시작한 것으로 심체(心體)를 존양(存養)하고 심용(心用)을 성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심법(心法)이라는 말은 송대 훨씬 이전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4)사부(師傅) : 일명 태사(太師), 태부(太傅)라고도 한다. 특히 중국에서 왕을 보좌하는 직책을 총칭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조에서는 왕의 아들을 교육하던 시강원(侍講院)의 정일품(正一品) 벼슬로 통하였다. 왕자를 교육시켰던 조선조의 관직으로 사부를 두었다고 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뒷날의 왕을 교육하였다는 의미로 통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총체적으로 볼 때 왕을 보좌하였다는 중국에서의 관직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의(疑)·승(丞)·보(輔)·필(弼) : 중국 고전에 의하면 의?승?보?필은 관직으로 천자(天子)의 측근에서 政事를 보필하였다는 벼슬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6)여분(旅賁) : 중국 주(周)나라의 관명(官名)으로 창과 방패를 들고 제후(諸侯)의 행차에 인도와 보호를 담당하였던 직책이다.


7)관사(官師) : 모든 관직 가운데 최상위(最上位)


8)훈송(訓誦) : 성현(聖賢)의 교훈을 외어 왕에게 들려주는 직책.


9)설어(?御) : 왕의 옆에서 왕을 모시는 시관(侍官)


10)고사(?史) : 음양(陰陽), 천문(天文), 예법(禮法)의 서적을 관장하였던 직책이었다. 때로는 어려운 국사(國事)에 임하여 왕의 능력으로 결정을 내리기가 매우 어려웠을 때 점(占)을 쳐서 국사를 결정케 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직책이기도 하다. 맹인(盲人)들의 악사(樂士)를 지칭하기도 하였다.


11)공사(工師) : 장인(匠人)의 우두머리를 공사라 하였다.


12)금감록(金鑑錄) : 장구령(張九齡 672~740)은 중국 당(唐)나라의 명신(名臣)이었다. 그는 당시 현종(玄宗)에게 금감록(金鑑錄)을 써서 올림으로써 충간(忠諫)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 당서(唐書)에서 장구령의 금감록을 금경록(金鏡錄)으로 달리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는 황제의 생일에 신하들이 황제에게 거울을 바쳐 축하하는 관례가 있었다. 이때 장구령은 금감록(일명 금경록)이라는 글을 지어 현종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내용은 역대 정치가 잘 되었던 사례(事例)와 잘못되었던 사례를 기록하여 앞으로의 정치에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을 지적한 것이다.


13)무일도(無逸圖) : 송경(宋璟)은 당대(唐代)의 인물로 무일도(無逸圖)를 그려 왕에게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무일(無逸)은 서경(書經)의 편명(篇名)이다. 주(周)의 성왕(成王)이 정사(政事)에 임할 때 성왕이 안일한 자세로 정치할 것을 염려하여 이를 경계하기 위해서 주공(周公)이 무일편((無逸篇)을 저술하여 성왕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한편 무일(無逸)의 내용은 농사짓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면서 지속적인 근면을 권장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14)단의육잠(丹?六箴) : 이덕유(李德裕)는 당대(唐代)의 사람으로 단의육잠(丹?六箴)을 지어 당시 왕이었던 경종(敬宗)에게 올렸다. 단의(丹?)는 붉은 색의 병풍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왕은 제후(諸侯)를 대할 때 이 단의를 뒤에 세웠다고 한다. 이덕유는 여섯 가지의 잠언(箴言)을 지어 그것들을 단의에 써서 왕에게 올렸는데 그들 잠언은 소의(宵衣)?정복(正服)?파헌(罷獻)?납회(納誨)?변사(辨邪)?방미(防微)의 육잠(六箴)이다. 이 육잠은 왕이 지켜야 할 것들을 풍자적인 표현 방법으로 기술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15)빈풍칠월도(?風七月圖): 빈풍(?風)은 시경(詩經) 국풍(國風)의 편명(篇名)이다. 빈풍의 7개 소편명(小篇名) 가운데 7월(七月)은 처음에 나오는 것으로 농촌의 풍경, 농사 일, 농촌 생활의 서정을 빈풍 7월에서 묘사하고 있다. 진덕수(眞德秀)는 이러한 내용을 도표(圖表)로 그려 왕에게 올렸던 것이다.


16)요순(堯舜)의 시대 : 요순(堯舜)은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을 지칭하는 말이다. 요순은 고대 동양에서 선정(善政)을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요순 시대라함은 오늘날 정치의 실현에 있어서 선정이 가장 이상적으로 실행된 시대를 대변한 말로 통하고 있다.


17)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 성학십도 가운데 여섯번 째 나오는 도표가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이다. 본래 심통성정도는 임은정씨(林隱程氏)가 작성한 것이었으나 퇴계는 여기에다 두 개의 도표를 작성하여 첨가하고 있다.


18)임은정씨(林隱程氏) : 본문에는 정씨(程氏)라고만 쓰여 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심통성정도에서 퇴계는 임은정씨(林隱程氏)로 표기하고 있다. 임은정씨의 본명은 복심(復心)이었으며, 원(元)나라 때 유명한 성리학자(性理學者)였다.


19)경연관(經筵官) : 경연(經筵)은 왕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론하는 자리(場)이고, 경연관(經筵官)은 그 강론을 담당한 직책의 인물을 말한다. 그런데 조선조(朝鮮朝) 경연강의는 유능한 학자들에 의하여 시행이 되었지만 실제로 정치에 반영되지 못한 채 그저 형식에 치우쳤던 경향이 많았었다.


20)“마음의 기능은……못하다.” : 원문(原文)은 맹자(孟子) 고자(告子) 상편(上篇)에 나온다.


21)홍범(홍범) : 앞의 주 3. 참조.


22)“생각 …… 만든다.” : 원문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편(洪範篇)에 나오고 있다.


23)방촌(方寸) : 사방(四方)으로 한 치의 얼마 안되는 넓이라는 뜻과 마음이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의 방촌의 의미는 가슴 부분의 심장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아주 좁은 범위의 가슴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24)“배우기만 하고……위태하다.” :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 나오는 말이다.


25)완미(玩味): 원문은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편에 나온다. 이 말은 학문이 익숙해져서 자기 몸에 배이게 되면, 그것을 뿌리로 하여 다른 여러가지 사실들을 유추하여 보편타당한 이해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26)안자(顔子)) : 안자(顔子: B.C. 513~482)는 공자의 수제자(首弟子)로 공문(孔門) 십철(十哲)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름은 회(回)이고 자(字)는 연(淵)이다. 공자와 같이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이다. 공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 공자에게 많은 칭찬과 사랑을 받았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가장 좋아하였으며, 3개월 동안이나 인(仁)을 어기지 않은 경우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안자의 학덕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공자에게 인(仁)에 관해 질문을 하였을 때, 공자는 그에게 “인의 실현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실천하는 가운데 있다”고 한 질의와 응답은 세인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는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았고, 잘못을 두 번 범하지 않았다”고 공자는 그의 사람됨을 높이 평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32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여 공자를 애통하게 하였다. 그느 증자(曾子)?자시(子思)?맹자(孟子)와 함께 사성(四聖)으로 지칭되면서 성균관(成均館) 대성전(大成殿)에 배향되어 오고 있다.


27)인(仁)을……마음) : 안회(顔回:顔子)는 그의 마음이 세 달 동안이나 인(仁)을 어기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하루나 한달 정도밖에 인(仁)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공자는 안자의 덕행을 높이 평가하였다.


28)증자(曾子)) : 증자(曾子:B.C. 505~?)는 공자의 제자로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삼(參)자는 자여(字與)이고, 증자(曾子)는 높이는 명칭이다. 공문(孔門) 가운데 효행(孝行)이 가장 돈독하였으며, 하루에 세 번의 반성을 통하여 도(道)를 닦았다고 전하여진다. 그는 공자의 도를 자사(子思)에게 전하였고, 자사는 다시 맹자(孟子)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대학(大學)과 효경(孝經)을 편찬하였다고도 전한다.


29)충서(忠恕)) : 충서(忠恕)에서 충(忠)은 중(中)과 심(心)으로 구성되어 있는 글자이다. 즉 중심(中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가운데(中)는 하나 뿐이고 보면, 중심(中心)은 「하나의 마음」 즉,「한 마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잡념(雜念)이 완전히 제거된 진실된 마음인 한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주자(朱子)는 충(忠)을 「최선아(最善我)의 실현(盡己之謂忠)」으로 풀이하고 있다. 결국 「한 마음」인 진실된 마음의 실현이나 「최선아의 실현」이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恕)는 여(如)와 심(心)의 의미를 간지하고 있다. 여심(如心)은 「같은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두 사람의 마음이 같아지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만나기 위해서는 서로가 진실된 한 마음이어야 한다. 서로가 거짓된 마음은 결코 같아지거나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이 서로 충(충)을 간직하고 실현할 때 서(恕)할 수 있다는 뜻으로, 충(忠)이 주체적 자기 발견이라면 서(恕)는 그러한 두 주체의 진실된 만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충서(忠恕)의 출전(出典)은 논어(論語)다. 공자는 증자에게 「우리의 진리는 하나로서 꿰뚫었느니라」라고 말하였을 때, 증자는 이 말을 듣고 「선생님(공자)의 말씀이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런 다음에 곧 공자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 때 주변에 있던 공자의 문인(門人)들이 공자의 말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증자에게 요청하여 왔다. 이 요청에 대답한 증자의 말이 바로 충서(忠恕)였던 것이다.


30)중화(中和)와 위육(位育): 중화(中和)와 위육(位育)에 관한 구체적인 의미는 중용(中庸)에 보이고 있다. 즉, 그 구체적인 의미는, “기쁨(喜)?노여움(怒)?슬픔(哀)?즐거움(樂)이 아직 감정으로 나타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그 희?노?애?락(喜?怒?哀?樂)이 감정으로 나타나면서 동시에 절도에 알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中)은 천하(天下)의 대본(大本)이고, 화(和)는 천하의 달도(達道)인 것이다. 중(中)과 화(和)가 극진하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안정되며 만물이 본연의 삶을 누리게 된다.”


31)근폭(芹曝) : 근(芹)은 미나리를 뜻하고, 폭(曝)은 햇빛을 쬐인다는 뜻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미나리를 먹다가 맛이 매우 좋아서 이 미나리를 그의 임금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어떤 백성이 겨울 날씨에 햇빛을 쬐다가 따뜻한 것을 느끼고, 추운 날씨에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그의 임금에게 알려드리려고 하였다 한다. 이 모두 임금에 대한 백성의 애틋한 마음과 충정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고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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