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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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노래한 풍류 시인 농암 이현보
  • 한글명 : 농암 이현보
  • 한자명 : 李賢輔
  • 호 : 농암(聾巖)·설빈옹(雪빈翁)
  • 시호 : 효절(孝節)공
  • 출생지 : 예안
  • 본관 : 영천
  • 나이 : 88
  • 생년 : 1467
  • 몰년 : 1555
연보
년도 내용
1467년 7월 29일, 예안현 분천리에서 참찬 이흠(李欽)과 권씨부인 사이에서 출생.
1475년(9세)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다. 성격이 호탕하고 사냥을 좋아하여 학업에 전념하지 않았다.
1485년(19세) 예안향교[향교(鄕校) : 조선시대의 나라가 운영하는 지방에 설치한 공립교육기관.]
입학. 이때부터 발분하여 독서에 전념하다.
1486년(20세) 문광공 홍귀달(文匡公 洪貴澾)선생께 수학. 가을에 향교의 문회(文會)에 참여하다.
1488년(22세) 권씨와 결혼.
1495년(29세)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
?1496년(30세) 성균관 입교, 이희보와 한방을 쓰며 친하게 지내다.
1497년(31세) 관시에 응시하여 1등으로 선발되다.
?1498년(32세) 3월에 식년문과 급제, 교서관 권지부정자로 근무.
5월에 종사랑(정9품)에 오르다.
1500년(34세) 4월에 함경도 영흥부 훈도로 임명되다.
1501년(35세) 3월에 승사랑(종8품)으로 오르다.
4월에 이조정랑인 김세필의 추천으로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에 임명받아 내직으로 돌아오다.
1502년(36세) 9월에 통사랑(정8품)에 오르다.
사관이 임금의 자리에 좀 더 가까이 앉을 수 있도록 요청하다.
1503년(37세) 품계가 선무랑(종6품)으로 오르다.
예문관 대교를 거쳐 봉교로 진급하다.
1504년(38세) 1월에 성균관 전적으로 진급하다.
4월에 선교랑(종6품)으로 올라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다.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다가 안동 안기역에 유배.
12월에 의금부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히다.
?1505년(39세) 2월에 석방되어 유배지인 안기역으로 되돌아가다.
1506년(40세) 9월에 연산군이 쫓겨나자 유배에서 풀려 성균관 전적으로 조정에 돌아오다.
1507년(41세) 호조좌랑(戶曹佐郞)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옮기다.
3월에 사헌부지평으로 승진하다.
1508년(42세) 4월에 품계가 봉직랑(종5품)에 올라 형조정랑으로 옮기다.
9월에 양친을 봉양한다는 구실로 외직을 자청하여 영천군수로 임명받았다.
1509년(43세) 고향에 명농당을 건립하다.
뛰어난 치적을 평가 경상도관찰사가 조정에 포상을 요청하다.
영천군에 쌍천당을 건립하다.
1511년(45세) 쌍천양로연.
1512년(46세) 휴가를 얻어 부모를 찾아뵙다. 애일당을 건립하다.
1513년(47세) 8월에 내직으로 복귀하여 10월에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다.
1514년(48세) 3월에 품계가 통훈대부에 올라 밀양도호부사로 임명되다.
1516년(50세) 10월에 충주목사로 임명되다.
1517년(51세) 11월에 친구인 이우가 세상을 떠남.
이우의 후임으로 안동대도호부사에 임명되다.
충주사람들이 계속 근무하게 해달라고 상소하다.
1518년(52세) 2월에 안동 향교에서 석전의례를 행하고 향사
향사 : 서원에서 공자등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를 말한다.
례와 향음주례를 거행하다.
향교교육을 진흥하는데 진력, 향교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의 유생들이 모여들었다.
향교에서 직접 강론도 하였는데 이황도 수업에 참여하다.
1519년(53세) 화산양로연, '화산(花山)'은 안동의 옛 이름이다.
농암은 이 자리에서 고을 원의 신분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1521년(55세) 11월에 예빈시 부정으로 조정에 돌아오다.
12월에 사복시정으로 승진하다.
맏아들 석량이 세상을 떠나다.
1522년(56세) 4월에 사헌부 집의로 옮기다. 10월에 외직을 청하여 성주목사에 임명되다.
?1524년(58세)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1월에 임금으로부터 표리(表裏-겉옷과 속옷)를 하사받음.
1524년(59세) 4월에 부모님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오다.
11월에 세자 시강원 보덕에 임명되어 세자(인종)를 가르치다.
1527년(61세) 4월에 특별히 통정대부로 승진되어 병조참지에 임명되다.
9월에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되다.
1528년(62세) 4월에 대구부사로 임명되다.
1529년(63세) 겨울에 평해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고향 가까운 고을로
바꿔 줄 것을 요청하여, 영천군수(현 영주)로 임명되다.
1531년(65세) 1월에 모친상을 당하다.
1533년(67세) 3월에 3년상을 마치다. 7월에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다.
9월에 휴가를 얻어 구로회를 열다.
11월에 승정원 우부승지로 임명되다.
1534년(68세) 1월에 경주부윤에 임명되다. 과거를 치러가는 이황을 격려하는 시를 지어보내다.
1536년(70세) 관직에 물러나 고향에 돌아오다.
11월에 가선대부(종2품)에 올라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다.
1537년(71세) 5월에 권씨부인의 상을 당하다. 8월에 부친상을 당하다.
1539년(73세) 6월에 부친, 조부, 증조부의 벼슬을 올려주는 증첩을 받고 사당에 제사 지내며 이를 고하다.
10월에 형조참판에 임명되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1540년(74세) 5월에 “분어행”을 짓다. 형조참판에 임명되다.
10월에 호조참판에 임명되다. 사직을 요청하나 허락되지 않다.
1542년(76세) 7월에 병이 들어 온천치료를 요청하여 허락받다.
7월17일 도성을 나오니 임금이 금서띠와 비단도포를 하사하고,
백관이 제청청에 모여 송별연을 베풀다.
돌아오는 배안에서 “효빈가”를 짓다. 지중추부사에 제수되나 병을 핑계로 낙향,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1543년(77세) 지중추부사.
1544년(78세) 1월에 지중추부사를 사직할 것을 요청하나 허락되지 않다.
8월에 홍언필이 은퇴한 이현보와 송순을 다시 불러 국정을 자문할 것을 임금에게
요청하여 허락받다.
1545년(79세) 3월에 중종의 국상을 당하다. 6월에 새로 등극한 인종에게 지중추부사를 사직하며,
나라를 다스리는데 경계해야 할 점을 개진하다.
인종이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자헌대부(정2품) 상호군에 임명하다.
7월에 인종의 국상을 당하다.
1546년(80세) 9월에 속 구로회를 개최하다.
1548년(82세) 애일당을 다시 짓다.
1549년(83세) 6월에 “어부사”를 완성하다. 8월에 정헌대부(정2품)에 오르다.
10월에 숭정대부(종1품)에 오르고, 경상도관찰사를 통하여 음식을 하사받다.
임금으로부터 금서대와 비단도포를 하사받다.
1551년(85세) 7월 29일 여러 아들이 수연을 베풀다. 이 자리에서 “생일가”를 짓다.
1553년(87세) 윤 3월에 “효빈가”, “농암가”, “생일가” 등의 서문을 짓다.
조정에서 고을원으로 있는 세 아들의 임지를 예안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주다.
1554년(88세) 1월에 대사간 정공유가 이현보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올릴 것을 청하니 명종이 간절한 유서를 내린다.
2월에 감사하는 글을 올리고 이단을 배척하고 임금이 덕행을 닦는데 힘쓸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1555년(89세) 3월에 이황이 벼슬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보낸다.
5월에 병이 더욱 깊어지다.
6월 13일, 긍구당에서 세상을 떠난다.
9월13일 조정에서 예조좌랑 박인원을 보내 제사 지내다.
1556년 이황이 이현보의 “행장”을 짓다.
1557년 3월에 ‘효절(孝節)’이라는 시호가 내리다.
1612년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
1700년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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