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전설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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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연리(光淵里)
- 이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리, 안망리의 각 일부와 의성군 단촌면의 유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광연리라 한다.
◇ 고양터·괭이터·광연리
이 마을은 고려현감이 살던 터가 있어 고양터, 괭이터라고 하였고, 화재가 자주 나무로 앞뜰에 연못을 파서 그 물로 마을 위 향로봉의 불끼를 끈다는 뜻에서 광연이라 하였으나 그 연못은 없어졌다. 지금은 마늘과 양파의 산지로 유명하다.
◇ 도름바우회암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있어서 동리에 갈 때 돌아서 간다고 회암 또는 도름바우로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은 마늘과 양파의 주산지이다.
귀미리(龜尾里)
- ◇ 구미·안귀미·귀미
이 마을은 산이 둘러있고 물이 켜 안은 듯 하고 거북과 뱀이 모인 듯하여 구미라 하였다고 영가지에 실려 있다. 또 한편으로는 미천이 굽이쳐 흐르므로 구비라 하던 것이 변하여 구미라고 하게 되었다 한다.
◇ 팽목
이 마을은 고운사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인데 큰 팽나무가 있어서 모두 쉬어가는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또 팽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팽나무정이라고도 한다.
◇ 가느미·간음리
이 마을은 고운사 쪽에서 내려오는 하천과 합쳐지는 사이에 있다고 간음이라고 한다. 또 1599년 김계호라는 분이 기개가 웅장하고 용력이 장사로서 임진란을 당하여 외적장졸을 사살 격퇴한 후 미천강 물소리가 은은히 들린다 하여 간음리라 했다고 한다.
◇ 후생촌
이 마을은 6·25동란 후 난민 정착촌으로서 정부의 후생사업으로 이루어졌다고 후생촌이라 한다. 하나산 중턱에 동촌과 서촌 두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구천리(九川里)
- 이 마을은 원래 일직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보리리, 원호리, 구미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구천리라 했다.
◇ 바랭이·바룡·팔룡·구천
이 마을에서 용을 현몽하여 꿈을 꾸고는 거듭 여덟의 형제를 낳아 8형제 모두가 등과를 했다고 팔용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이 8형제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냇물이 구(九)자 형태로 흐른다고 하여 구천으로 명명되었다 한다.
◇ 청산골·청산곡
구천리 남쪽으로 미천 건너에 있는 들이다. 이 마을은 뒷산이 항상 푸르다 하여 청산골, 청산곡이라 한다. 마을 뒤의 청산은 명산이라고 하며 안동 권씨, 안동 김씨 등의 묘지가 많고 두 개의 재실이 있다.
국곡리(菊谷里)
- 약 180년전 하국곡에서 이조참판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주변의 산세가 국화꽃을 닮았다 하여 국곡이란 이름이 주어졌으나 국싯골로도 불리어 진다.
◇ 상국곡
이 마을은 국싯골 위쪽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상국곡이라 일컫는데 안마와 거릿마가 있다.
◇ 샛들 간평
국싯골 동쪽에 있는 마을인데 앞에 넓은 들이 있다. 상국곡과 조탑리의 사이도 되고 남후면과 풍천면의 중간이 된다하여 샛들이라 한다.
◇ 하국곡
국싯골 아래쪽에 있는 마으로 지대가 낮다고 해서 하국곡이라 하는데 국곡의 중심 마을이다.
◇ 삼거리
국곡리, 조탑리, 용각리로 나누어지는 길목이라고 삼거리라고 한다.
망호리(望湖里)
- 본래 일직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소호리, 안망실, 지실, 성남, 노래곡을 병합하여 안망실과 소호리의 이름을 따서 망호리라 한다.
◇ 소호리
이 마을은 고려말 소시랑(蘇侍郞)이 주거하였고 앞에는 호수가 있어 소호리라 하였으며 보물 제475호인 소호헌(蘇湖軒)이 다. 한산이씨(韓山李氏)와 달성서씨(達成徐氏)의 동성 마을로 북쪽으로 향한 음지마을과 남쪽으로 행한 양지마을이 있다.
◇ 지실(至室)
소호리에서 귀미로 가는 골의 끝에 있다고 지실이라고 한다. 갈마웅굴 또는 갈매웅굴이라 하는 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 안망실(安望室)
이 마을은 인근 마을에 비해 고지대로서 앞 전망이 좋아 평안히 바라볼 수 있는 곳이어서 안망실(安望室)이라고 했다 한다. 도 옛날 안씨(安氏)가 이 살아서 안망실이라 하였다고도 하나 지금은 영양 남씨가 주로 살고 있다.
◇ 비네미·성남
이 마을은 약 400년 전 진주(晋州) 목사(牧使)를 지낸 성남(성(星)南) 장문보(張文輔) 선생이 정착하여 거주하였으며 성남정(星南亭)이란 정자가 있어 성남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노랫골·노래곡(魯來谷)
약 300년 전 노애공(魯愛公)이란 선비가 정착하여 살던 마을이라서 노애골이라고 하다가 뒤에 노래곡·노랫골로 불렸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은 고추농사가 주산을 이루고 있다.
명진리(明津里)
- 이 마을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명리, 덕리와 광연리 평팔리의 각 일부와 의성군 단촌면의 망진리를 병합하여 명리와 망진의 이름을 따서 명진리라 한다.
◇ 더붓골·대복골·도복골·덕동(德洞)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마을로 옛날에는 마을 주위에 대나무 밭이 많았으므로 대밭골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더붓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짓골·집터골
신라시대에 어떤 부자가 살았는데 이 집에는 손님이 끊인 날이 없었다. 수없이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는데 짜증이 난 안주인은 시주 온 스님께 쌀 1말을 주면서 손님을 안 오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를 애걸했다. 그러자 스님은 집 앞에 있는 바위 셋을 가리키며 조금씩 깨뜨려 보라고 일럭주고 떠났다. 그리하여 하인을 시켜 그 바위를 정으로 깨뜨렸다. 그 바위의 형상은 마치 벌집같이 생겼는데 벌집을 깨뜨렸으니 벌이 다 날아간 셈이다. 그 후 손님의 발걸음이 끊어졌고 그 부자는 망했다고 한다.
◇ 바랑골·팔랑골·명동(明洞)
대복골 서쪽에 있는 골로 지형이 마치 중의 바랑처럼 생겼다 하여 바랑골이라 했다 하기도 하고 또는 바람을 많이 타는 곳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1700년대에는 성동(星洞)이라 불렸던 기록이 달성(達成) 서씨(徐氏) 족보에 있고 명동(明洞)이란 말은 성(星)이 빛을 내니 밝다는 뜻에서 명동(明洞)이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은 양지쪽에 양지마와 음지쪽에 음지마가 있다.
◇ 망징이·망지·망진(望津)
마을 앞 냇가에 있는 미륵 바위 아리 깊은 소(沼)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미륵 앞에서 소원 성취를 빌었다는데 연유되었다. 지금은 땅이 비옥(肥沃)하여 고추 마늘의 특산지로 생활이 윤택해진 편이다.
◇ 생골·샘골·향교골
향로봉 중턱에 약수가 피부병에 특효하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을 샘골이라 했다는 유래가 있으며 또 약 300년 전에 행교가 있어서 향교골이라고도 한다.
◇ 아랫터
망징이 북동쪽 400m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망징이와 샘골 중간에 있다. 망징이에서 보면 약간 아래쪽에 있어서 아랫터라고 부르며 옛날에는 몇 집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빈 터만 있다.
송리리(松里里)
- ◇ 현마·현촌(縣村)
이 마을은 일직현(一直縣)의 소재지였으므로 현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현마 또는 현촌이라고도 부른다.
◇ 속골·송골·속맛골·송곡(松谷)
이 마을은 골짜기에 있으므로 속골이라고 한다. 또 고려말 충렬왕 때 일직손씨(一直孫氏) 시조인 손홍량이 출생한 곳으로 송목(松木)이 무성하여 솔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용각리(龍角里)
- 이 마을은 지형이 용의 뿔처럼 생겼으므로 용뿌리, 용각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조탑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각리라 한다.
◇ 상용각(上龍角)
이 마을은 용각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상용각이라 한다.
◇ 중용각(中龍角)
용각의 가운데 위치하므로 중용각이라 한다. 상용각 아래쪽에 큰 못이 있다.
◇ 세장골·시장골
중용각 동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 골짜기가 가늘고 길게 생겼다고 하여 세정골이라 하며, 세장사(細長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새용각·신용각(新龍角)
세장골 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용각이라 하며, 남동쪽에 산으로 막혀 일조량이 적은 마을이다. 대부분 타 지역에서 이주해 온 농가들로 고추와 담배 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 아룻골·이루골
용각 남동쪽에 있는 긴 골짜기로 농가가 있으며, 거의 타 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대부분 산지를 개간하여 고추와 과수원을 이루어 살고 있다.
운산리(雲山里)
- 이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운산리, 소호리, 송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운산리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운산역(雲山驛)이 있었고 현재는 일직면의 중심지가 되어 면사무소, 경찰지서, 우체국, 초등학교, 시장 등이 있다.
◇ 굴티·구르티·구티·운산(雲山)
이 마을은 굴처럼 생긴 고개가 있으므로 굴티, 구르티, 구티라 했다고 한다.
◇ 안구터·구운산(舊雲山)
약 400년 전 함안(咸安) 조씨(趙氏)의 선비가 임란을 피하여 이 곳에 기거했으며 구름이 덮인 산 속에 산다하여 운산(雲山)이라 일컬었다 한다. 지금은 조씨가 별로 없고 여러 성씨가 모여 고추 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 거리구터
구터못 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옛날 운산역 본터였으나, 동리가 번창하지 못하고 각 성씨가 모여 살고 있으며 주로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다.
원 리(院里)
- ◇ 원골·원리·원곡(院谷)
조선시대에 원(院) 에서 행인들의 편의를 제공했다고 하여 원곡, 원리라 칭했으며 지금은 두 개의 마을로 되어 있어 안쪽에 있는 마을을 안원골, 바깥쪽의 마을을 거리원골이라 일컫는다.
◇ 여부장골
원골의 남동쪽 작은 계곡에 있는 마을로 옛날 여부자가 살았으며 어부정(魚富亭)이 있어서 여부정골이라 한다.
원호리(遠湖里)
- ◇ 머무리·멈물·원호(遠湖)
높은 산이 사방으로 에워 쌌으며 물이 멀다하여 멈물 또는 머무리라 하다가 변하여 원호가 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솔리 일부를 병합하여 원로리라 한다. 조선(朝鮮) 인조 때 권홍(權弘)이란 선비가 약 360년 전에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당시 남쪽 멀리 큰 호수가 보인다 하여 원호(遠湖)라 칭하였다고 한다.
◇ 향교·교통(校洞)
약 150년 전에 김윤한(金潤漢)이란 선비가 개척하였으며, 마을에 향교가 있었다 하여 교동(校洞)이라 불렀다 하며 당시는 일직현(一直顯) 송리(松里)에 속해 있었다. 새무리 북서쪽 미천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 앞 중앙에 서낭당이 있는데 느티나무 3그루와 뾰족한 자연석 돌 1개가 있다. 이 마을에 있던 향교가 빠져나가고 마을 앞이 허하다고 갈라당 성황신을 모셔 와서 위한다고 한다.
◇ 장사리(長沙里)
이기주(李氣周)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사래 긴 밭을 만들었다고 하여 장사리라 했다하며 이랑 길이가 700m에 달하며 부인과 같이 밭을 메다가 부인을 잃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향교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탑리(造塔里)
- ◇ 조탑·탑골·탑마·탑곡·조탑동(造塔洞)
고려 말에 일직현에 속하게 되었고 1300여 년 전 통일신라시대 고창군 남단 표지로 칠층 전탑을 세웠다 하여 조탑리로 불리어진다.
평팔리(坪八里)
- ◇ 별마을·성곡·성읍·평팔리
옛날 성읍(星邑)이 있었으므로 별마을 또는 성곡(星谷)·성읍이라 하였던 것이 변하여 평팔리로 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전곡(新田谷)·계곡(桂谷)·검무곡(劍舞谷)·환당곡(丸堂谷)·사기점(沙器店)을 병합하여 평팔리가 되었다.
◇ 거뭇골·거뭇곡·검무곡(劍舞谷))
옛적에 홍수로 거무산이 들에 감져 거미 한 마리가 앉을 만한 자리만 남았다 하여 거뭇골이라 하였으며 지금은 고추 농사를 많이 하고 있다.
◇ 곗골·갯골·기곡·기골·계곡(桂谷))
신전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마을 입구에 큰 계수나무가 한 그루 있었기 때문에 계수나무골이라 하였으며 변하여 곗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 섶밭밑·신전골·신전곡(薪田谷))
단당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뒷산에 울창한 섶나무가 많았는데 마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였으나 그 섶나무의 영험으로 마을이 다시 번창하였다 하여 섶밭밑이라 했다 한다.
◇ 단당골·단당곡(丹堂谷))
마을 앞에 당집 터가 있으며 옛날 정원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길운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지내는 날은 길손들이 당집 앞을 지나가려 하면 발이 땅에 붙어 지날 수가 없어서 당집을 검무산 너머로 옮겼더니 그 후 이상하거ㅔ도 마을의 가축이 죽고, 산 너머 당집에서 돌과 흙이 계속 날아모르로 하는 수 없이 당집을 지금 돌더미만 남은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은 해주 오씨가 대부분이며 고추 마늘이 주산을 이루고 있다.
◇ 선녁골·선녓골·서곡(西谷))
평팔못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므로 선녓골이라 하며, 고추 마늘이 주산을 이루고 있다.
◇ 큰평지 배나무골 남쪽 평지에 있는 마을로 새로 개척한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여러 가지 잡목만 울창하게 들어서 있고 마을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