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전설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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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곡리
- 안동시내에서 청송방면의 국도를 따라 가다가 안동대학교 앞 포진교를 건너 좌회전을 하여 6km 정도를 가면 오른쪽에 고곡리라는 입석이 보인다. 고곡리는 원래 안동군 임서면의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소리 일부를 병합하여 고곡동(리)이 되고 다시 1931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임하면에 속하게 되었다. 고곡리라는 명칭은 마을이 위치한 곳이 산골짜기이며 이 골짜기가 깊고 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현재 고곡리에는 111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예천임씨와 울진임씨가 주로 많이 살고있고, 고일에는 청주정씨입향시조인 동하(東夏)의 양호정(養浩亭)이 있으며 10여가구 약 2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금소리
- 금소리는 안동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원래 안동군 임서면의 지역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소동(리)이 되고 그 후 임하면에 편입되었다. 금소1·2리로 분리되었지만 자연마을은 금소 1개 마을로 되어있다. 이 마을은 원래 금수 또는 금양이라고 하였는데 마을의 안산(案山)인 비봉산(飛鳳山) 봉우리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마을 앞 들에 흐르는 수로가 비단폭을 펼쳐 놓은 듯이 물이 흐른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그러다가 비봉산 아래에 있는 오동소(梧桐沼)엔 거문고가 있어야 부합이 된다는 전설에 의하여 금소(琴韶)로 개칭되었다. 또 일제강점기 때에 금소에서 만세시위를 강하게 하여 일본인들이 마을의 이름을 금소라고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옛날에 일정한 거리마다 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역을 두었다 하여 금소역촌 또는 역마라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 금소리에는 212가구에 561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주민의 절반 정도가 예천임씨이다. 예천임씨는 조선 선조 때에 이 마을에 입향하였다고 하며 입향조(入鄕祖)는 임억숙(林億淑) 선생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지애밝기란 민속놀이가 행해졌으며 안동의 특산물인 안동포가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노산리
- 안동시내에서 청송방면의 국도를 따라 12km 정도 가면 임하보조댐이 나온다. 여기서 200m 가면 왼쪽에 천전2리의 안내판이 있다. 이 길을 따라서 2km 정도 가면 왼쪽에 천전2리의 자연마을인 광산이 나온다. 광산으로 들어가 마을 중앙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다시 2km 정도 가면 노산리가 나온다. 노산리는 원래 안동군 동후면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초현동, 석동동과 임현내면 반시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노산동이 되었다가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노산리의 일부 지역이 수몰되었고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되면서 노산리의 남아있는 지역은 임하리면으로 편입되었다. 노산리의 명칭은 마을이 노산(盧山)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으로 노산촌이라고도 하였다. 노산리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마을로는 현재 수멜, 샛터, 궁구리 등 3개 마을이나 수몰되기 전에는 꽃골과 반제자 2개 마을이 더 있었다고 한다. 현재 노산리에는 25가구에 78명이 거주하고 있다.
신덕리
- 신덕리는 안동시내에서 동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임하면의 소재지이다. 이 마을은 원래 안동군 임서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당동과 인덕동, 평지동 그리고 남선면의 이곡동 일부와 임현내면의 추월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덕동이라고 하였다. 신덕이란 명칭은 신당과 인덕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1931년에는 임하면에 편입되었다. 신덕리는 1리와 2리로 분리되었으며 신당, 구이덕, 신이덕, 옹기점, 장승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2002. 8. 20) 신덕리에는 166가구에 806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오대리
- 오대리는 안동시내에서 동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길안으로 가는 국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있는데 오른쪽은 나천이라는 마을이 있고 나머지 마을은 왼쪽 산 아래에 있다. 오대리는 원래 안동군 임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나천리, 금소리 일부, 길안면의 산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대동(리)이 되었고 1931년에 임하면에 편입되었다. 오대라고 하는 명칭은 마을에 오동나무 숲이 있어서 오동나무 숲의 터란 뜻으로 붙여졌다고 한다. 오대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원오대, 대흥마을, 어덕, 베일, 나천, 등 5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현재 오대리에는 184가구에 330명 정도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임하리
- 임하리는 임하현의 관아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현내, 현내동이라고 하였으며 또 반변천이 흐르는 강가에 있다고 하여 임하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에 안동군 임현내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에 추월리 일부를 병합하였으며 1931년에 임하면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1리와 2리로 분리되어 있다.임하1리가 현내, 임하2리가 나중에 편입된 추월이다. 현내는 약 500년 전에 단양우씨(丹陽禹氏)가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하며 현재 1리에는 단양우씨와 의성김씨, 안동권씨 등을 비롯한 여러 성씨 195가구 520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2리에는 51가구 150명이 거주하고 있다.임하리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는데 특히 임하1리는 현재 임하면에서 가장 많은 고가옥과 문화재를 보유한 마을이다. 오류헌(五柳軒), 양동댁(良洞宅), 이우당종택(二愚堂宗宅), 안동임하동동3층석탑(安東臨河洞東三層石塔),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빈서원(泗濱書院), 안동임하동십이지삼층석탑(安東臨河洞十二支三層石塔) 등 지정문화를 비롯하여 송석재사(松石齋舍), 원림사지석불좌상(院林寺址石佛坐像), 와룡정사(臥龍精舍), 길헌(吉軒), 학산정(鶴山亭) 등을 비롯한 비지정문화재가 있는데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도 있고 또 안동댐과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이건한 것도 있다.
천전리
- 안동시내에서 청송방면의 국도를 따라 11km 정도 가면 임하보조댐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천전리이다. 천전리는 1리와 2리로 분리되어 있으며 1리는 임하보조댐에서 1km 정도 국도를 따라 가면 왼편에 있다. 2리는 임하보조댐에서 도로 건너에 있는 작은 도로를 따라 2km 정도 들어가야 나타난다. 천전리는 원래 안동군 임하내면의 지역이었으며 1914년에 현재의 천전2리 지역인 반시동 일부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1931년에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임하면에 편입하였다. 천전리는 내앞이라고도 한다. 마을 앞에 반변천이 흘러서 유래된 것으로 주로 1리를 지칭하는 것이다. 내앞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지닌 마을인데 의성김씨 청계파(靑溪派)의 동성마을로서도 많이 알려졌다. 내앞의 의성김씨 청계파 입향조는 김만근(金萬謹) 선생이다. 원래 의성김씨가 내앞으로 입향하기 전에는 안동의 풍산현(豊山縣)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 갈 무렵인 공민왕 때에 의성김씨 시조로부터 9세손이 되는 김거두(金居斗) 선생과 그의 아들인 김천 선생이 남향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그 후 김천 선생이 풍산에서 안동읍내인 방적동(邦適洞)으로 이건하였다. 방적동은 밤적골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안동시 율세동이다. 그 후 다시 김천 선생의 증손되는 김만근 선생이 해주오씨(海州吳氏)인 처가의 근처인 천전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명문세가로서의 자리매김을 시작하였다. 천전리에 이주한 김만근 선생의 손자인 청계(靑溪) 김진(金璡) 선생 대(代)에 오면서 가문이 크게 번성 하였는데 김진 선생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명망이 드높은 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천전리에는 명문세가 동성마을의 명성에 걸맞게 그윽한 고가옥이 즐비하며 많은 문화재가 있다. 특히 학문을 좋아하고 권장하는 분위기에 따라 안동 최초의 근대학교인 협동학교를 건립하였는가 하면 또 국가에 대한 애국심도 충만하여 일제강점기 때에는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2002년 8월 기준- 천전1리에는 의성김씨를 비롯한 여러 성씨 133가구에 378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며 천전2리에는 36가구에 83명이 거주하고 있다.
추목리
- 추목리는 임하면에서 남서쪽에 있다. 안동시내에서 12km 정도 가면 이천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서 곧 바로 우회전하여 도로를 따라 3km 정도 가면 추목리로 접어들게 된다. 추목리는 원래 안동군 임서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1914년에 점리, 평지리 일부를 병합하여 추목동(리)이라 하고 그 후 1931년에 임하면에 속하게 되었다. 추목리의 남쪽 끝은 의성군 점곡리와 맞붙어 있다. 현재 추목리는 5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주이씨가 주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2002년 8월을 기준으로 106가구에 279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