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전설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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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평리(桂坪里)의 자연부락

  • 욋돌,와평(瓦坪),와평리(瓦坪里),왯들 : 어떤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여 기와를 굽던 곳이란 데서 지어진 이름으로 지금에 와서는 왯들로 불리어진다. 마을의 북서쪽에 계곡지라는 저수지가 있어 계평들의 수원이 되고 있다. 살머리,산머리,산두리(山頭里) : 엄실 동쪽 산머리에 있는 마을인데, 洛東江쪽으로 뻗어 있는 산 끝을 깎아서 이룬 마을로 산머리가 살머리로 불리게 되었다. 독지골,독지곡(獨池谷) : 외따로 떨어진 마을이라고 하여 독지골이라 부르며 옛날에 도둑이 출몰하기도 하여 도둑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왯들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이 마을 북쪽에는 萬石谷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만석군 부자가 살았다고 한다. 엄실(奄實),엄곡(奄谷) : 지세는 둔덕이 지고 엄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연유하여 배씨의 어떤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고 엄곡이라 하다가 엄실로 불리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孝誠이 지극한 사람이 부친의 侍墓살이를 3년간 했다하여 빈소골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웃절,상사(上寺),상계곡(上桂谷) : 살머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편에 上桂寺라는 작은 절이 있어서 웃절이라 이름 지었다.

괴정리(槐亭里)의 자연부락

  • 갓디,갓뒤,지북(枝北) : 숲의 뒤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고 하여 갓디라 한다. 여러 姓氏가 살고 있는 산재 부락으로 주민들의 협동심이 강하여 1974년도에 자립마을로 선정되었으며 1974년도 대통령 하사금을 받았다. 개상골,채상곡(採相谷),개쌍곡(介雙谷) : 약 1500년 경 마을 뒤에 있는 平山 申氏 墓가 개의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산골의 지형이 채상[개상]처럼 생겼다. 까칠개,작평(鵲坪) : 1600年 경 安東 權氏가 개발한 마을로 마을 앞 넓은 들에 두 내가 합하되 비가 오면 들이 水浸되어 듬벙('웅덩이'의 사투리)이 되었는데 그 때 들옆에 있는 野山에 늘 까치떼가 모여 살아서 까칠개라 하였다. 바래미,발산(鉢山) : 1600년 경에 마을이 생길 때 서향집을 짓고 보니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바래미라고도 하고, 마을 뒷산 모양이 바릿대(鉢) 같다해서 바래미라 했다 한다. 절디,절뒤,사후(寺後) : 1500년 경에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없으나 절 뒤에 마을이 있었다고 하여 절뒤하고 한다. 솟절,솥절,소사(小寺),송사(松寺),정사동(鼎寺洞) : 갓뒤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조그마한 절이 있었다하여 솟절이라고 하며, 1500년 경 甲始生(上將公)이라는 선비가 尙州에서 이주 개척하면서 鼎寺洞이라고도 했다 한다. 수박골,수박곡(水?谷) : 1600년경 약수가 있어 그 물을 마시면 어떤 병이든 고쳤다고 하나 현재는 그 흔적이 없다. 마을 앞에 수박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수박골이라고 한다. 영배이 : 갓디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朴氏가 대부분이며 밭농사를 주로하고 있다. 마을 뒤에 영배이 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노리(魯里)의 자연부락

  • 모늑골,모놋골,모녹곡(暮魯谷) : 옛날 뒷산에 暮雲寺란 절이 있어 暮雲谷이라 부르다가 뒷날 暮魯골이라 불렀다 한다. 일설에는 恭愍王이 播遷 時 魯國公主를 데리고 이 곳을 지나다가 해가 저물어 유하고 갔다하여 暮魯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석교(石橋),마까무(磨鑑) : 옛날 마을 앞에 돌 다리가 있어 石橋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그 후 磨鑑이라고 부르다가 마까무골로 변하여 지금 마까무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납들고개,시선(申石),신석현(申石峴) : 고개에 거북 모양을 한 돌이 있어 납돌[申石]고개라 한 것이 부르게 쉽게 납들고개라 전해 오고 있다.

마애리(麻厓里)의 자연부락

  • 마 래,마라,마애(麻厓) : 마을 모양이 中國의 輞川이라 하다가 바위를 조아 만든 부처(石造昆盧舍那佛)가 있어서 麻厓라 한다. 망천절벽(輞川絶壁) 麻厓 앞 洛東江 기슭에 길게 늘어선 아름다운 절벽이 곧 망천절벽이다. 강물이 마을 동쪽에서 서북으로 굽이를 돌려 절벽 앞에는 물이 고여 沼를 이루고 흘러간다. 넓은 白沙場이 펼쳐 있으며 江 언덕에는 松林이 울창하다. 이 곳은 산 좋고 물 좋고 경치가 좋아서 소풍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시우실,시우동(時雨洞) : 농토가 高地에 있고 하천이 없어 旱災가 많은 곳으로 비가 때에 맞추어 와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하여 마을 이름이 時雨실이 되었다 한다.

막곡리(幕谷里)의 자연부락

  • 밤골,밤갓골,율리(栗里) : 마을 뒷산에 북으로 갈라진 바위가 디딜방아의 살개 같다고 하여 방갓골이라 했으며, 옛날부터 밤나무가 많이 있어서 밤나무골 즉 栗里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미르미,미음곡(眉陰谷),미산묘(眉山墓) : 이 마을 山頂의 음지진 곳에 조선 英祖때 출생하여 安東 座首別監을 지낸 光山金光濟,眉山翁의 墓가 있고부터 眉陰谷 또는 美山이라고 불리어지며 마을 개척 당시 森林이 아름다워 미르미라고도 하였다. 두곡(杜谷),막곡(幕谷) : 아주 옛날에는 杜谷이라고 했으나 고려초 견훤군과 왕건 군사가 합전다리 부근에서 會戰할 때 이쪽에서도 義兵들이 일어나서 幕을 쳐서 陣을 구축하여 勝戰하는 데 이바지한 데에 由來하여 幕谷이라 했다 하며, 지금은 아랫막실,웃막실로 부르고 있다. 천석골,청석골(靑石谷) : 마을 앞에 靑石이 있다하여 청석골이라고도 하며, 옛날 이 곳에 千石군의 집앞 뜰 안에 있었다고 하는 우물이 남아 있어서, 약 3 정보의 농토에 물을 대어주고도 남는다고 한다. 주상골,주상곡(周上谷) : 긴골 막바지에 위치한 부락으로서 주위에 두루 높은 골이 있다하여 주상골이라 한다. 느티나무골,괴동(槐洞) : 느티나무가 있어 불리게 된 이름이며 막실 앞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큰 느티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말라죽고 그 옆에 작은 연못과 金海 金氏의 墓가 많이 흩어져 있으며 막실동리에서 약 1 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만운리(晩雲里)의 자연부락

  • 못대미,지담(池潭) : 평지못 南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이 생길 때 마을 앞에 沼가 있어 池潭이라 한다. 방대미,방담(方潭) : 孝子 權方潭이 살았다해서 方潭이라 하기도 하고 모가 진 못이 있어 방대미라고도 한다. 정자못,평지 못,평지(平地),평촌(平村) : 마논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처음에는 평지못(만운못)에 있었는데 1956년 풍산 조합에서 저수지를 만들 때에 온 마을이 이 곳으로 옮겨 와서 정자못이라 하였으며, 고추 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범바위,호암(虎岩) : 마을 뒷산 바위 모양이 범과 같다해서 虎岩이라고 하며, 마논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특용 작물로서 담배 농사를 짓는다. 잘패,조파(助波) : 매봉산 북서쪽에 山間마을로 담배 농사를 주로 경작하고 있다. 대추월,추월(秋月) : 400여 년 전에 權秋月이 살았다 하여 추월이라 하기도 하고, 대추 나무가 많아서 대추월이라고도 한다. 말논,마논,두답(斗沓) : 사방에 높은 산이 둘러 있어서 天獄같이 되어 있으며, 말처럼 생겼다 하여 마논이라 하였다.

매곡리(梅谷里)의 자연부락

  • 새 터,신기(新基) : 梅谷洞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朝鮮 孝宗 때 南氏가 살면서 新安東이라 하였다. 앞에는 봉황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응고개가 洪水 때 터져 도로가 되었다. 응고개 새터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응고개라 하는데 원님 행차가 드나들었다하여 원고개라고도 한다. 고개 안쪽이 늪지대였는데 수해를 당했을 때 枝谷宅이란 女人이 自己밭에 물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응고개를 호미로 파서 물이 흘러 나가게 하니 차차 파여서 고개가 없어지고 평평한 도로가 되었다고 한다. 밤실,율리(栗里) : 새터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며 아랫밤실과 윗밤시롤 나뉜다. 밤나무가 많아서 밤실로 불리었다고 전한다. 강변마(江邊) : 새터 동쪽 큰 냇가에 있는 마을이며 본래 늪지대이던 곳이 수해 때 천방이 터져 새로 마을을 냇가로 옮겨 이루었다 한다. 매날,매산(梅山) : 새터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梅谷에 속했다 하며, 벼 農事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미곡(美谷),미질 : 막곡(幕谷),막골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733년 경에 형성되었다. 좁은 농토에서 벼 농사와 밭농사로 생홀하고 있다. 번곡,번거곡촌(番居谷村) : 매날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벼 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마을에 明泉이란 샘이 있는데 수십척 깊이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새절골,신사곡(新寺谷),신사동(新寺洞) : 밤실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683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옛날 이 마을의 북서족 산밑에 조그만한 절이 있어서 이 골짜기 일대를 새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眞城 李氏 집단 부락이다.

상리리(上里里)의 자연부락

  • 웃마,상리(上里) : 豊山縣의 윗쪽이 되므로 웃마라하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상리동이 되었다. 우릉골,우렁골,우동(宇洞) : 고려때 宇農寺란 大刹이 있어 우렁골이라 불렀으며 上里洞의 中心 部落이다. 새못골,신지곡(新池谷) : 새못이 있어 생긴 이름이며, 우렁골 남동에 위치하고 있다. 신근솔,싱구실,종송(宗松),신구실(新求室) : 산에 솔을 많이 가꾸어 種松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신구실이라하며 우렁골 북동쪽에 있다. 시묘골,시묘곡(侍墓谷) : 李朝,明宗時 선비 金時佐가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다가 돌아감에 墓幕을 짓고 3년간 侍墓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旌閭閣이 있다. 권산지,권산정(權山亭) : 1500년 경 安東 權氏가 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떠나 갔으나 그들의 亭子는 남아서 權山亭이라 하였으며 도린마 북동쪽에 있다. 도린마,도린말,회촌(回村),고산(孤山) : 마을 앞을 흐르는 上里川이 이 곳에서 돌아간다고 하여 도린마라 하였으며 이로 인해 동그란 외딴 산이 생긴 후로 고산이라 하였다. 동짝마,동촌(東村) 도린마 :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동짝마라 國道邊에 위치하고 있다. 안마,내촌(內村) : 웃마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사라밭이 많이 있다. 앙겟골 : 李氏의 薺室이 있는데 墓지기의 아내가 시루떡을 하다가 떡이 설다는 꾸중을 듣고 자결한 후부터 절판을 쓰게 되었다는데 연유가 있다. 도린마 서북쪽에 잇는 마을이다. 장마터,장기리(場基里) : 80년 전에 豊山市場이 선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80년부터 豊山市場이 확장되고 상리동에서 가장 큰 동리이다.

서미리(西薇里)의 자연부락

  • 서미골,서원골,송몰,서미(西薇),이화동(梨花洞),서원촌(書院村) : 西美라고 하던 것을 梨花洞으로 개명하였다가 다시 洞名을 西薇로 고쳤다. 西薇洞 중 북동쪽 일부는 西磵祠가 있어 송골, 서원촌이라 부르고 있다. 梨花洞이라는 명칭은 乙巳年에 西厓가 寓居時개명 했으며 永嘉誌에 그 기록이 있다. 현재 쓰는 西薇洞은 淸陰 金尙憲이 은거시 고사리 뿌리를 캐어 延命해서 西美를 西薇로 개명했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西厓가 은거 시 개명했다고도 한다. 아들바우 은절바웃들 위 500m 지점에 잇는 바위로 바위 위에 바위가 얹혀서 입을 벌린 것처럼 되었는데 잔돌을 던져서 위에 얹히면 아들을 낳고 아래에 얹으면 딸을 낳는다고 전해진다. 대목재(大木峴) : 약 280년 전 平海 黃氏 黃興世씨 부인 삼척 김씨가 풍천 인금동에서 喪夫하고 국난과 빈곤을 피하여 어린 자식을 업고 이 곳을 찾으니 이 산골 막바지에 큰 고개가 있어 넘지 못하고 자리를 잡게되어 지금까지 平海 黃氏 후손이 살고 있으며 그 당시부터 그 고개에 큰 나무가 있어 지명을 대목재라 불렀다 한다. 지금까지 그 무는 邑寶로 보존하고 있다.

소산리(素山里)의 자연부락

  • 시미,금산(金山),소산(素山) : 옛날에는 이 마을이 金山村이라 불렸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淸陰 金尙憲 先生이 낙향하여 은거할 때 金氏가 모여 사는 마을 이름을 金山村이라 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하여 素山이라 고쳤다 한다. 이 마을 뒷산 素耀山의 이름 중 素字와 山字를 따서 素山이라 했다 하는데, 깨끗하고 희고, 빛나는 산에 둘러 사인 마을이라는 뜻도 된다. 한편 口傳되어 오는 말로는 뒷산의 형상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해서 꾁미라고도 하고, 또 金山村은 화려한 이름이니 淸貧하고 儉素한 金氏 사는 마을은 素山이라 하는 것이 좋다고 淸陰이 고쳐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다. 이 마을은 安東 金氏가 400여 년 동안 살아 오는 集姓村이다. 역골,역동(驛洞) : 素山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 역이 있어서 역골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金氏가 대부분이다. 나바우 : 梅谷川과 槐亭川이 合流하는 늪지대에 큰 바위가 나열해 있어 나바우라 하였다. 지금은 늪과 바위가 埋沒되고 마을이 형성되었다. 설못,사지(?池),사지동(?池洞),사지촌(?池村) : 옛날 마을이 생길 때 이 곳에 상자만한 못이 있어 설못이라 하였다. 설못 상자만한 못을 1938년 확장하여 설못이라하였다. 골마,곡촌(谷村) : 설못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못 주변의 농토에서 벼 농사를 주업으로 생활하고 있다. 새마회,당마,신촌(新村) : 설못 남서쪽에 위치한 넓은 마을로 최근 형성되었으며 교회당이 있다. 설못의 물을 이용하여 들에서 벼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서원마,선마 : 현재 素山 2洞에 있는 조그만 골짜기 마을의 이름이다. 원래 이 마을 남서쪽 산 밑에 三塘 金瑛先生 享祀를 지냈는데 조선 고종 때 철폐되어 없어졌다. 이 골짜기에 서원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해서 오늘날 선마라고 변해서 불려지고 있다.

수리(水里)의 자연부락

  • 중동(中洞),수동(水洞),수동촌(水東村) : 행정 구역상 이 마을이 중앙에 위치한다 하여 中洞이라 하였고, 上洞,中洞,下洞이 있었는데 지금 上洞은 없고 水東村이라 하였다. 水東은 水東村에서 비롯되며, 수동 별신굿과 國神堂 에 관한 다음과 같은 傳說이 有名하다. 恭愍王이 紅巾賊을 피해 이 지방으로 피난을 오는데 쫓기는 형편이라 자기를 추종하는 부하가 한 두 사람씩 줄게 되었으며 풍산에 도착했을 때는 5,6 名에 지나지 않았다. 다급한 恭愍王은 豊山 동쪽 상리동 산 정상에 허수아비 병정을 곳곳에 세우고, 南으로 피신을 하였다. 마침 때가 가을철 아침이라 안개가 자욱했는데 왕을 쫓던 군사가 산 위를 보니 잡아 삼킬 기세를 한 많은 군사가 활을 쏘는 형용을 하고 내려다 보고 있어 겁에 질린 亂賊들은 후퇴하였다. 恭愍王은 무성한 대나무 숲에 피신하여 무사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國神堂을 세워 공민왕의 영정을 모시게 되었고, 해마다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차츰 그만두게 되었다 한다. 별신굿은 조선 중엽 이 마을에 권사도라는 靑年이 있었는데 그는 말 잘타고 활 잘 쏘아 그 무술이 천하 일품이었다. 어느 날, 이 수동마을에 어디선가 종일 하늘을 울리는 용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불안과 공포에 떨며 어쩔줄을 몰랐다. 이 때 권사도 청년이 용마를 달래 보겠다고 나섰다. 권사도는 말을 타고 마을을 달려나가 洛東江 어귀에 있는 깊은 웅덩이 옆 큰 바위에서 울고 있는 용마에게 다가갔다. 신통하게 용마는 사도가 가까이 오자 울음을 그쳤다. 사도는 그 용마를 타고 마을로 돌아와 온갖 정성을 다하여 무술을 닦았다. 몇 년 뒤 임진 왜란이 일어나 용마를 타고 출전하는 권사도가 國神堂 앞을 지나는데 말의 발이 떨어지지 않는 이변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뜻밖의 변고에 술렁거렸다. 그러자 권사도는 말에서 내려 이는 國神堂을 돌보지 않아 신주가 노하신 것이라 하며 그 안으로 들어가 빌었더니 말의 발이 떨어져 전장으로 나가게 되었고 후일 큰 전공을 세워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에 마을에서는 國神堂을 재건하여 정월 대보름에는 수동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인근 5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사당 앞에서 굿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굿을 수동 별신굿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400여 년 계속되었다 한다. 옛날에는 마을 복판에 왕골논이 있어 용봉 문체의 돗자리를 짜서 나라에 헌납하기도 했다. 정자나무고개 옛날 山頂에 큰 나무가 있어 고개를 넘는 사람은 여름이면 의례히 이 나무 밑에서 땀을 식혀 쉬어 넘는 고개라 하여 정자나무고개라 하였다. 정자나무 山頂에서 魯洞으로 가는 농로가 위치한 곳에서 내려다 보면 도로변으로 개천에 물이 흐르는 것을 중심으로 산봉우리 끝에 낚시터 같이 생겨서 낙수산끝이라고도 한다. 하동(下洞) : 옛날 행정 구역상으로 보아 水洞의 맨 下段에 있다고 하여 下洞이라 하였다 한다. 이말기,이말계 : 下洞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처음 이 마을에 李氏가 살았으므로 李마을이라 하다가 앞에 洛東江이 흐르고 있어 시내 溪字를 따서 이말계로 불리기도 하고 이말기라고도 했다. 구루미,진곡(眞谷) : 洞 서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로 참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 하여 진곡이라 불리었으며 구름이 쉬어 가는 곳이라 하여 구루미라고 불리었다 한다. 임진 왜란때 李如松이 山冗을 끊어서 고갯길이 났다고 한다.

수곡리 (壽谷里)의 자연부락

  • 증 수(增壽) : 마을 사람들이 長壽한다고 하여 增壽라고 불렀으며 1280년 경 安東 權氏가 개척하여 약 300년 살았다 한다. 그 후 豊山 金氏가 살다가 모두 떠나고, 海州 吳氏 松菴公이 병자호란 때 낙남하여 살아 그 후예가 집단 부락을 이루고 거주한다. 사느미,시니미,산음(山陰) : 마을 주위에 산이 많아 저녁때가 되면 山 그늘이 일찍 온다고 하여 산음이라 한다. 토일(吐日),토귀(退歸) : 처음에는 獨家村으로 적막하게 살았으나 점차 가구와 인구가 불어남에 날이 새는 것 같다하여 吐日이라 불렀다 하며 일설에 의하면 退溪가 地理를 밟아 이 곳을 왔다가 돌아 갔다하여 退歸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다. 매일골,매일(梅日),매곡동(梅谷洞) : 1800년 경 慶州 金氏가 農幕이 차차 커져서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신양리(新陽里)의 자연부락

  • 원뜰,원평(院坪) : 조선 시대 甘了院이 있어 院뜰이라 한다. 지금은 여러 性氏가 살고 있다. 잿마,성촌(城村) 원뜰로 가는 길목의 낮은 재에 생긴 마을로 잿마라 한다. 여러 性氏가 모여 논농사와 밭농사를 겸하고 있다. 새낙골,새납골,조납곡(鳥納谷) : 새들이 많이 모여 드는 마을이라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조그만 개울을 사이에 두고 안팎으로 갈라져 있다. 창말,창촌(倉村) : 조선시대 倉庫가 있던 마을이라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며, 지금은 밭 농사로 고추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안동오티(安東烏?),오티 : 까마귀가 먹이를 먹는 형국이라고 해서 오티라하며 오티고개 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지금은 담배 농사를 지어 많은 소득을 오리고 있다. 당골,땅골,단곡,당곡(塘谷) : 가뭄이 심한 마을이기에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못 塘字를 붙여 당곡이라 했다. 건넛마,월촌(越村) : 안흥 앞 내 건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건넛마라 한다. 10여 년 전부터 사과나무를 심기 시작한 이 마을이 지금은 거의가 사과 나무밭으로 심어져 있어 생활이 윤택하다. 선바웃골,입암(立岩) : 마을 입구에 선바위가 있었는데 연유하여 마을 이름이 생겼다.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신양동에 속하는 선바웃돌과 현애동에 속하는 선바웃골로 7,8 가구씩 갈라져 있다.

안교리(安郊里)의 자연부락

  • 역마,역촌(驛村) : 1530년 경 洪氏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1800년 경 素山洞에 있던 역을 이 곳으로 옮겨와 역마라 불려지게 되었다. 어란(魚卵),우안(愚安) : 마을 앞에 갈대늪이 있어서 고기가 모여 알을 낳고 부화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새역마,신역(新驛) : 1800년 후반에 역마에 있던 역이 옮겨와서 생긴 마을이다. 역마에 이어 생긴 마을로 풍산 평야 북서쪽 운보둑 아래 길게 펼쳐 있으며 주로 풍산 평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60가구의 여러 姓氏가 모여 살고 있다. 역전(驛前) : 1930년대 慶北線 豊山驛이 생긴 후 형성된 마을이다. 의지에서 이사온 여러 姓氏가 살고 있으며 큰 창고와 도정공장이 있으며 공장 지역으로 발전하고 있다. 세거리,삼거리(三巨里) : 안동,풍천,예천의 셋방면으로 가는 길이 있어 세거리라 하였다. 안동 풍산 합승 종점으로서 이곳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으로 거리가 복잡하다. 호수는 20여 가구이다.

오미리(五美里)의 자연부락

  • 오 미골,오릉(五陵),오묘(五畝),미동(美洞),오미(五美) : 마을의 地形이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있어 五陵이라 부르다가 후에 五畝로 고쳤다. 五美는, 조선 시대 중기에 이 곳 豊山 金氏의 가족 8형제 중,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사실을 크게 칭찬한 말로서 인조 대왕께서 지어준 이름이다. 豊山 金氏의 집성촌으로 동녘골(東村)과 서녘골(西村)로 나뉘어 있다. 장판재(將板嶺) 五美洞의 바로 북쪽에 있으며, 豊山 金氏가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던 시기에, 이웃 마을의 박씨와 친선을 도모하여 이 재에서 장기를 두고 놀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죽암정(竹巖亭) 이 곳 金氏가 조선 중기에 건립한 것으로, 동녘골(東村)의 북쪽 뒷산에 위치한다. 무성한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의 바위를 헐어 그 위에 지었으며 일족의 친목 행사 장소는 물론, 주로 서실로 활용되었다. 화수당(花樹堂) 동녘골에 위치하여, 이 곳 金氏 일족의 모임 장소로 쓰였으며, 또 서실로 활용되었다. 일제 초기에는 동민 자체로 五陵學術講習會를 열어, 신식 교육을 실시, 항일 사상 등을 일깨웠던 곳으로 현재 豊北初等學校의 전신이다. 보푸래미,보림(甫林) : 五美洞의 서녁골에서 서북쪽과 서쪽으로 좀 떨어진 마을로, 아랫보푸래미(下甫林)와 웃보푸래미(上甫林)로 나뉜다. 아랫보푸래미는 농사를 짓고 살며, 웃보푸래미는 豊山 金氏의 世德祠가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道林追遠祠와 道楊講堂은 조선조 중기의 건물로 유명하며, 이 강당은 김씨 일족의 행사 장소로, 또 서실로 활용되었다. 미내미,미나미,미남리(美南里) : 五美洞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뱅개미,반가미,방감(方鑑) : 옛날에는 白楊으로 불렀다고 하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方鑑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安東 權氏들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各姓들이 살고 있다. 솔가실, 솔갖,송지(松枝) : 오미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많은 데서 유래되었으며, 高靈 朴氏의 집성촌이다. 개거리,개골,개곡(開谷),용흥(龍興) : 용이 올라 갔다는 데서 유래하여 龍興이라 했다하여 솔갖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산골(山谷) : 개거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천수답이던 농토가 수리 시설로 인하여 전천후 옥토로 변한 마을이다. 수릉골,수렁골(水蓉谷),수용리(水龍里) : 마을 앞의 들 이름이 수용(水蓉)들인 데서 연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한말까지는 60여 가구의 대부락이 형성 되었고, 수리 시설로 주변 농토가 옥토로 되었다. 새랄,사라(仕羅),위라 : 개거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도랑의 중앙을 중심으로 해서 예천군 호명면 본동과 접경이 되며 호명면 구소재지가 이 곳에 있었다. 절터(仕羅寺) : 新羅時代 마을 뒷산에 仕羅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지금도 절터에는 기왓장이 발견된다.

죽전리(竹田里)의 자연부락

  • 악심이,학심이,악심(岳心) : 옛날에 岳心寺란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지금은 고추와 담배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악대,학대(鶴大) : 鶴駕山 아래 제일 큰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고추와 담배를 많이 재배한다. 관음절,가늠절,관음사(觀音寺) : 옛날 觀音寺란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며 지금은 고추와 담배를 많이 재배하는 마을이다. 대밭골,대밭,죽전(竹田) : 마을 위에 자생하는 대나무 밭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관음절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리리(下里里)의 자연부락

  • 아랫마,하리(下里) : 上里川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豊山邑內 제일 아래쪽이 되므로 아랫마 혹은 下里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여 수박 등 특용 작물을 재배,소득을 올리고 있다. 고창(高倉,庫倉,高昌) : 옛적에 高倉亭이란 樓臺가 있어 고창이라 부르고 있다고 하며, 또는 낙동강이 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어 江을 오르내리는 배들의 貨物을 保管하기 위해 마을 언덕에 倉庫를 지었다 하여 庫倉이라 불렀다 하며, 또 高昌이란 사람이 살면서 도둑을 잡아 나라를 도왔다 하여 고창이라 하기도 한다. 한절골,대사동(大寺洞) : 高麗 時代에 큰 절이 있어 한절이라 불렀으며, 또한 절의 이름이 한사(한절)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재 가구수는 15가구가 살고 있으며 "배미끝"과 이어져 있다. 동신나무(洞神一) 중마 뒷산에 있는 나무로 높이 3m 되는 소나무의 가지가 아래로 휘어져서 기이하게 되었는데 마을에서 매년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장터,시장마,시장(市場) : 朝鮮 時代 上里川 냇바닥에서 장이 서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서 장이 서고 한다. 5일 장으로 3일과 8일에 장이 선다. 새마,새말 : 甲戌年(1934) 대수해에 上里川이 범람하여 많은 가옥이 유실되었으며 이 홍수에 들판이 모래 밭으로 되었는데 그 위에 점차 집을 지어 형성된 마을이다. 골마,곡촌(谷村) : 上里와 下里 중간에 있으며 중마을 남동쪽 작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란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미골,남산(南山) : 마을 뒤에 있는 산을 南山이라고 하며, 南山 끝머리라고 하여 "배미끝"이라고 하며, 약 300여 년 전에 부락이 생겼다고 한다. 중마,중말,중촌(中村) : 上里와 下里의 中間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골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철뚝안 : 옛 慶北線(醴泉-安東)이 있을 때 철둑의 안쪽에 위치한 데서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시장을 끼고 있어서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많다. 탑골,탑동(塔洞) : 한절골과 작은 구릉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어느 시대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石塔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철뚝밖 : 慶北線 철로가 놓이고 나서 둑 바깥쪽에 생긴 마을이며 豊山 들판에 띄엄띄엄 살던 주민이 甲戌年 수해 때 가옥이 침수되자 높은 곳을 찾아서 집을 지어 생긴 마을이다.

현애리(玄厓里)의 자연부락

  • 감 애(甘厓),가매,현애(玄厓) : 본래 豊山縣의 지역으로서 높은 산 밑이 되므로 가매,甘厓,또는 玄厓라 하였는데 高宗 32년(1895) 地方官制 개정때 安東郡 豊北面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양동 新村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玄厓里라고 하였다. 장역골,장여곡(長餘谷) : 玄厓마을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長餘 골짜기에 있다 하여 장역골이라 했다. 뱁제,백아현(百我峴),백인현(百人峴) : 玄厓마을 서쪽에 있는 고개 밑의 마을로서 옛날 醴泉縣으로 넘어갈 때 고개에 호랑이가 나타나므로 百人이 모여 고개를 넘었다 하여 百我峴,百人峴,뱀재라고 한다. 선바우,입암(立岩) :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서 있어 선바우라고 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바위가 벼락을 맞아 땅 속으로 들어가 지금은 옛날 보다 작은 바위가 서 있다.

회곡리 (檜谷里)의 자연부락

  • 제일,회곡(檜谷),본동(本洞) : 옛날부터 제일이라 불려오다가 朝鮮때에 도구 거리에 큰 회나무가 있다고 檜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아랫절 : 옛날 마을 두시골에 萬石을 하는 富者가 살았는데, 작은 절을 아랫편에 세웠기에 아랫절이라 하였으며 회곡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갈매절,갈매사(葛梅寺) : 딱지골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인근 부락중에 지세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딱지골 : 회곡 북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딱나무가 우거진 골이 있었기에 마을 이름을 딱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뱃가,낙연(洛淵) : 회곡 아래에 있는 마을로 앞에 洛東江 물이 흐르고 낙연이라는 깊은 沼가 있는데 옛날에는 돛단배가 오르내렸으며 닻을 내려 머무르고 곡식과 소금 등 여러 가지 상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으로 지금까지 뱃가로 부르며 단호동으로 건너가는 나룻터이다.

풍산읍 054-840-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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