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암(立巖)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 부르며, 양진당(養眞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채는 고려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조선건축양식으로서 고려양식과 조선양식이 공존하는 고택이며, 풍산류씨 겸암파 대종택(大宗宅)이다.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入鄕祖)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 공(公)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口자 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一자 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오른편 북쪽에는 2개의 사당(祠堂)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불천위: 공신이나 대학자 등의 탁월한 자에게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사랑채/사랑채 기단(基壇)
솟을대문 안 정면에 立巖古宅이란 현판이 붙은 건물이 사랑채이다. "입암(立菴)"은 류운룡(柳雲龍)의 부친 류중영(柳仲郢)의 호이다. 따라서 양진당을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고도 불렀다. 안채 쪽으로 1칸 방 2개가 붙어있고 맞은 편에 2칸의 사랑방과 6칸의 대청이 붙어 있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두리기둥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기단은 막돌을 사용한 바른 층 쌓기이며, 안채의 허튼 층 쌓기 기단과 비교된다. 기단이 매우 높은 것은 홍수(洪水)에 대한 대비한 것이며, 또한 매우 웅장하여 종가 사랑채로서의 위용을 보이고 있다.
사랑채의 대청
대청은 6칸으로, 매우 큰 규모이며 높은 기단과 함께 종가의 사랑채로서의 위용을 보이고 있다. 사랑채의 측면과 뒷면에는 판문을 달았다. 살대를 쓰지 않고 나무판으로만 만든 문을 판문(板門)이라고 하는데, 대문이 아닌 대청 같은 곳에 쓰는 문은 구분하기 위해 당판문(堂板門)이라고 한다.
반빗간 부엌
안방의 좌측에 3칸 규모의 부엌이 있는데, 2층 구조로 1층은 맨바닥이고 2층은 마루를 깐 반 빗간 형태이다. 2층은 바깥으로 난간을 두어 공간을 더 두었으며, 반 빗간의 옆쪽으로는 찬방(饌房)과 곳간을 따로 두었다.
안방 대청
분합 (分閤: 접어서 위로 걸 수 있는 문)을 달아서 통풍이 잘 되도록 하면서, 큰공간으로 활용이 가능한 것이 대청 (大廳)의 쓰임새이다. 안채의 대청은 안방과 건넌방을 연결해 주고 있으며, 안채의 대청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안채 기단
사랑채와 같이 막돌을 사용했지만, 축조 양식은 사랑채와 다르게 허튼 돌쌓기 방식을 택했으며, 기단의 높이도 매우 높다.
큰사당
사랑채의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있는데, 양진당은 특이하게도 2채의 사당이 있다. 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으며, 작은 사당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로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솟을대문 옆의 식객방과 말구유
솟을대문의 안의 우측에 달린 방들은 식객(食客)들이 머무는 방이었다. 좌측에는 마굿간이 달려 있으며, 현재도 말구유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