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西厓)류성룡(柳成龍)선생이 31세 때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한 서원으로서, 1614년 선생을 흠모한 사림(士林)들이 존덕사(尊德祠)를 세워 선생을 배향(配享)하였으며, 그 후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공을 배향하였다. 1863년「병산(屛山)」으로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복례문, 만대루, 동재, 서재, 입교당, 장판각, 존덕사, 전사청, 고직사 등이 있다.
입교당에서 바라몬 만대루(만대루:보물 제2104호)
사찰(寺刹)들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구심적(求心的) 경관구조(景觀構造)이나, 서원은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원심적(遠心的) 경관구조(景觀構造)로서 그 경관구조가 서로 다르다. 병산서원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매우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서원 경내로 들어 와서 밖을 보면 바깥의 자연과 일체가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으며, 이것은 선비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복례문
병산서원의 정문으로 정면 1칸의 대문이다. 복례란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는 문구에서 따온 말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지만 이 문의 경우는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문의 좌우로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만대루 현판
만대루(晩對樓)의 만대(晩對)란 이름은 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인 제목:백제성루(白帝城樓)의 "…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만하니..."란 구절에서 명명되었다고 하며, 송나라 주희(朱喜)가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에도 만대정(晩對亭)이 있었다고도 한다.
만대루의 기둥과 계단
마루를 받치고 있는 24개의 기둥들은 나무가 자란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서 사용하여 인공(人工)이 가해진 맛을 줄였으며,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입교당은 중앙의 대청이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좌우에 방이 있는데, 좌고우저(左高右底)에 의거하여 좌측 방은 서원의 원장(院長)이 기거했으며「명성재(明誠齋)」라 이름하였고, 우측 방과 대칭이지만 툇마루를 두어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우측 방을「경의재(敬義齋)」라 하였으며, 서원 부원장의 방이나 교무실에 해당하는 기능을 하였다.
입교당의 석축과 아궁이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2단으로 석축을 쌓았으며,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높은 쪽은 건물의 기단으로, 낮은 쪽은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궁이는 1.8m의 기단 양끝에 커다랗게 뚫려 있는데, 건물의 전면에 있는 것이 다른 건물에서는 찾기 힘들다.
장판각
목판 및 유물을 보관하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습기를 줄이기 위해 정면 3칸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으며,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사진에서와 같이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였다.
신문
서원에 내3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정면 3칸으로, 솟을 3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존덕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위패와 수암(修巖) 류진(柳袗)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祠堂)이다. 가공(加工)된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변형된 翼工形(익공형)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단청이 되어있고, 전면 좌우에 계단을 두고 있다.
정료대
야간조명을 위한 석조물로서, 마당 좌우에 1쌍이 있는데, 사발 형태의 돌 위에 관솔(-소나무의 송진이 많이 엉긴 부분) 가지나 기름 등을 태워 불을 밝혔다. 팔각형의 기둥은 주역(周易)에 나오는 팔괘(八卦)를 의미하고 있다.
관세대
제향(祭享)시 제관(祭官)이 손을 씻는 세수 대야를 올려놓는 석조물로서 네모난 형태의 역사다리 모양을 취하고 있다. 위가 넓은 것은 대야를 올려놓기 안정되게 하고. 아래가 위 보다 조금 비스듬히 들어간 것은 가까이 가서 씻기 수월하게 하기 위한 설계로 생각된다.
병산
서원 앞에는 노송들과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병풍(屛風)을 펼쳐놓은 듯 한 병산(屛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