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종가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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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종가유물(柳成龍宗家遺物) 보물 제460호

충효당

충효당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보물 제414호,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서애 류성룡선생의 종택이다.

  • 류성룡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서 자(字)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며,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이다.
    일찍부터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들어가 심경근사록(心經近思錄)을 배웠으며, 도학.문장.덕행.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관화록(觀化錄), 운암잡록(雲巖雜錄), 난후잡록(亂後雜錄), 상례고증, 침경요의 등이 있고, 편서로는 대학연의초, 황화집(皇華集), 구경연의(九經衍義), 문산집, 정충록발문, 포은집, 퇴계집, 효경대의 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하여 문인 정경세가 서애행장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 영모록, 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류성룡선생 이 직접 사용하던 물건

갑옷과 투구

갑옷과 투구
  • 갑옷은 몸통과 하체를 감싸는 "상의갑" 및 "하의용 군갑"과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 착용하는 "액엄(液掩)", 무릎을 감싸는 "슬갑", 어깨에 두르는 "견갑(肩甲)", 종아리에 착용하는 "족갑(足甲)" 등이 있다. 갑옷과 투구를 합해 갑주(甲胄)라고 하는데 갑옷과 투구가 따로 된 것과 한데 붙어 있는 것 등이 있다.

혁화(革靴:가죽신) 1켤레

혁화
  • 두꺼운 가죽을 측면에 대고 바닥은 5중(重)으로 하여 꿰맨 가죽신이며, 일부에 손상은 있으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상아홀(象牙笏) 1개(個)

상아홀
  • 홀(笏)이란 신하들이 임금을 뵐 때나 종묘사직에서 제사지낼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두 손을 모아서 쥐던 패를 말하며, 여기에 왕명을 메모하기도 하였다. 이 홀은 상아로 만등어져 있으며 길이 41㎝로 우유 빛이다.

갓끈 4종류

갓끈
  • 전립(戰笠:군인이 쓰는 벙거지)용과 입자(笠子:갓) 용이 있는데, 모두가 위계에 따라 다르게 꾸며져 있으며,
    1. 호박(琥珀) 갓끈(길이 86㎝, 73聯)
    2. 골제(骨製) 갓끈(길이 85.5㎝, 회백색 72聯)
    3.오칠목제(烏漆木製)갓끈(길이 84㎝, 74聯)
    4.밀화(蜜花) 갓끈(길이 84㎝, 담홍색 구슬 302聯)의 4종(種)이다.

관자(貫子) 2종류

관자
  • 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를 관자라 하며, 품계에 따라 다른 관자를 달았는데, 정3품까지는 옥관자(玉貫子), 2품은 금관자(金貫子), 1품은 다시금 옥관자(玉貫子)를 쓰게되므로 재상이 되는 것을「환옥(還玉)」이라 하였다.

유서통(諭書筒) 1개(個)

유서통
  • 국왕이 체찰사 등에게 중대한 사명을 내릴 때의 지령서를 유서(諭書)라고 하였으며, 유서를 넣는 통을 유서통이라 하였다. 왕대의 마디 부근을 자른 양끝에는 장식을 박고 끈을 매었고 중심을 타원형(길이 14㎝)으로 오려내어 유서를 넣고 잠글 수 있도록 자물쇠를 만들어 달았다. 기세(氣勢)가 등등한 사람에게 "유서통 졌느냐?"라는 속담이 있는데 그 의미는 유서통을 매고 가는 사람은 도중에서 어느 것에도 걸릴 것이 없었던 것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동국지도 서애선생수택본(東國地圖西厓先生手澤本) 1점(點)

유동국지도서애선생수택본
  • 북방 오랑케에 대비하기 위하여 두만강 일대 육진의 방어시설을 상보토록 한 선생의 지시에 의하여 함경도북병사가 그려서 올린 지도이며, 왼편이 모두 손상되어 있으며 현재 삼수, 갑산, 단천, 길주, 명천, 경성(鏡城), 부령, 종성, 은성, 경원의 각 면과 아오지의 편면 만이 남아 있어 완본은 아닌 것 같다. 한지에 담채로 그려져 있으며, 가로 61㎝×세로 36㎝이다.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西厓先生母夫人昆文記) 1축(軸) (보물 460-2)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
  • 서애 선생이 32세 때에 선친이 별세하여 유산이 선생의 모부인(母夫人) 정경부인 김씨에게 상속되었으나, 그로부터 20년 후에 정경부인 김씨는 시댁과 친정의 제위토(祭位土)와 접빈용토지(接賓用土地)를 우선 분재(分財)하고 나머지 유산을 자녀에게 공평하게 분재한다는 뜻을 밝힌 분재기(分財記:재산과 노비를 자식에게 나누어주면서 이를 기록한 문서)로서, 매우 희귀한 종류의 문서이며, 크기는 가로 362㎝, 세로 67.2㎝로 한지에 행서체로 쓰였으며, 여러 곳이 벌레로 인해 훼손되었는데, 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財主母貞敬夫人金氏 (재주모정경부인김씨) 方形墨印
    證家翁五寸姪從仕郞前英陵參奉李輔 (증가옹오촌질종사랑전영능참봉이보) 手決
    三寸姪箕子殿參奉金應南 (삼촌질기자전참봉김응남) 手決
    筆執四寸孫幼學申口 (필집사촌손유학신민) 手決

    *方形墨印(방형묵인):네모형태 도장을 인주(印朱)를 사용치 않고, 먹물을 사용하여 찍었는데, 그 시대는 인주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임.

    *手決(수결):도장 대신에 자기 직함 아래에 자필로 쓰던 일정한 자형(字形)이며, 오늘날의 Sign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음.

고문서:(보물 460-3)

고문서
  • 조정에서 류성룡(柳成龍) 선생에게 내린 고문서들이며 공신녹권(功臣錄券), 교지(敎旨), 제문(祭文) 등 총14종이다. 이 문서들은 류성룡 선생 및 조선시대 공문서 양식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광국공신교서(光國功臣敎書) 1축(軸)

광국공신교서
  • 1590년(선조23년) 종계변무(宗系辨誣:명나라에 그릇 기재된 조선왕조 종계를 바로잡음.)의 공(功)으로 광국공삼등(光國功三等) 풍원부원군(?原府院君)으로 서훈되었으며, . 이 교서는 가로 42.9㎝× 세로 115㎝의 긴 축(軸)으로, 년시(年時)는 만력(萬曆)18년(1590년) 8월이며, 한석봉의 글씨이다.

광국공신과록패(光國功臣科祿牌) 2매(枚)

광국공신과록패
  • 1605년 1606년에 내린 2장의 공신과록권(功臣科祿券)이다.

    大米 5石(쌀 50말)
    小米 1石(좁쌀 10말)
    太 2石(콩 20말)의 록(祿)으로 되어 있다.

노비하사교지(奴婢下賜敎旨) 2매(枚)

노비하사교지
  • 만력(萬曆) 34년(1606)과 숭덕(崇德) 3년(1638)의 2매이다.

도체찰사교서(都體察使敎書) 1매

도체찰사교서
  • 임진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는 군의 작전을 조정 통제하여 왜적을 물리치라는 특별교지를 만력(萬曆)20년(1592년) 12월 23일 선생에게 내렸다.

문충공시호교지(文忠公諡號敎旨) 1매(枚)

문충공시호교지
  • 1627년(인조 5년)에 서애 류성룡 선생에게「문충공」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시주(諡註)에 "道德博聞曰文(도덕박문왈문)이요, 危身奉上曰忠(위신봉상왈충)이라"고 부기(附記)하여 문충(文忠)의 뜻을 밝혔다.

    ※敎旨(교지):4품 이상에게 내리는 사령(辭令)

판중추부사교지(判中樞府事敎旨) 1매(枚)

판중추부사교지
  • 선생이 임진년 5월에 영의정에서 물러나 계사(癸巳:1593년) 3월 충청·전라·경상도 등 삼도 도체찰사로 임면되었을 때 이 판중추부사의 교지를 받았다.판중추부사란 영의정을 역임한 이가 현직에서 물러나 한직에 있을 때 내려지는 직첩이다.

호성공신교지(扈聖功臣敎旨) 1매(枚)

호성공신교지
  • 임진란 때 선생은 서울에서 의주까지 선조(宣祖)를 호종하였으며, 수도 서울의 수복에 공로가 컸다고 하여 1604년(선조 37년) 6월에 호성이등공신 으로 서훈되었는데 이것은 같은해 10월에 내린 한석봉 필적의 교지이다.

풍원부원군교지(豊原府院君敎旨) 1매(枚)

풍원부원군교지
  • 1590년 선생이 우의정 당시 광국공신 풍원부원군으로 서훈되었으나 임진란이 끝나던 무렵인 1598년의 11월 19일 간신들의 무고로 삭탈관직 당하였다가 (※ 이날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전사하였음.) 그 2년 후인 1600년에 직첩을 환급받았으며 1603년에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이것은 그 때의 교지이다.

영의정교지(領議政敎旨) 1매(枚)

영의정교지
  • 만력(萬曆)20년(1592) 5월 2일 파천(播遷) 길에 있던 선조(宣祖)는 개성에서 선생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는데 그 때의 교지(敎旨)이다.

증정경부인교지(贈貞敬夫人敎旨) 1매(枚)

증정경부인교지
  • 선생의 부인 이씨는 1589년(선조 22년) 선생이 예조판서로 계실 때 별세하였는데 그 후 선생이 영의정이 되자 1596년(선조 29년)에 정경부인 교지가 내려 졌다.

불윤비답(不允批答) 3매(枚)

불윤비답
  • 선생은 영의정으로 계실 때 여러 차례 사표를 제출하였는데 선조(宣祖)는 그때마다 "허락할 수 없다."는 답신을 내렸다. 그 중 만력(萬曆)24년 9월, 만력 26년 2월, 만력 28년 1월에 있었던 정사(呈辭)에 대한 불윤비답(不允批答)이다.

선조제문(宣祖祭文) 1매(枚)

선조제문
  • 선생의 부고를 받은 선조(宣祖)는 곧 승지 이유홍(李惟弘) 공을 보내어 조위를 표하고 예조좌랑 구헌(具憲) 공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그 때의 제문이다.

왕세자(王世子)(광해군(光海君))제문(祭文) 1매(枚)

왕세자
  • 선생의 부음에 접하자 왕세자 광해군은 곧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 류항(柳恒) 공을 보내어 치제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제문이다.

정조제문(正祖祭文) 1매(枚)

정조제문
  • 정조는 화성(수원성)을 조영할 때 승지 이익운 공을 보내어 선생의 묘우에 치제하고 선생이 제정한 "축성방략"을 가져다 보았는데 이것이 그때의 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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