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평(金宣平, ?~?), 권행(權幸, ?~?), 장정필(張貞弼, 888~?) 세 사람은 왕건이 안동 병산전투에서 견훤을 물리치고 고려를 건국할 수 있도록 도와 삼태사(三太師)로 불린 인물들임.
고창성주 김선평과 신라 왕족의 일가인 권행, 신라 호족 장정필은 신라 말기인 930년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병산전투 당시 안동부(安東府) 주민들과 함께 왕건을 도와 전쟁에서 승리, 고려 개국 공신에 이름을 올림
왕건은 삼태사의 공을 높이 치하해 ‘삼한벽상삼중대광아보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의 직위를 제수하고 고창군(古昌郡)을 부(府)로 승격시킴. 특히, ‘동국’(東國)을 안전하게 했다는 뜻에서 지명을 ‘안동’(安東)으로 명명한 후 삼태사의 본(本)으로 내렸으며, 이후 후손들이 김태사는 안동 김(金), 권태사는 안동 권(權), 장태사는 안동 장(張)의 시조로 삼았음.
김선평(金宣平, ?~?)
김선평은 안동김씨의 시조이다. 901년에 신라의 52대 효공왕의 아들로 경주 흥덕궁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912년 효공왕이 숨을 거둘 때 11세의 어린 나이였던 관계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 926년(경애왕 3) 26세 되던 해에 고창군古昌郡(지금의 안동) 성주城主로 부임했다. 그런 다음 930년에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후삼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안동의 병산甁山(지금의 와룡면 서지리)에서 격돌했을 때 권행, 장길 등과 함께 고려에 협조하여 왕건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에 왕건은 김선평에게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김金’씨 성을 하사했는데, 이때부터 안동김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권행(權幸, ?~?)
권행은 신라의 김알지 후손으로, 원래 이름은 김행(金幸)이다. 그는 왕건과 견훤이 안동의 병산(甁山, 지금의 와룡면 서지리)에서 격돌할 때 김선평, 장길과 함께 고려에 협력했는데, 이때 왕건이 그에게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권(權)’씨 성을 하사한 것으로 전한다. 이에 얽힌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김행이란 사람은 나라의 종성(宗姓, 왕실 성씨)인데 견훤이 임금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견훤은 의리상 함께 하늘을 머리에 두고 살 수 없으니 왕공(왕건)에게 귀부(歸附)하여 우리의 수치를 갚지 않으리오”면서 고려에 항복하니, 왕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행(幸)은 능히 기미(幾微)에 밝고 권도(權道)에 통달하였다”하고 권(權)씨 성을 하사했다.(『안동권씨 태사공실기』)
장정필(張貞弼, 888~?)
장정필은 886년에 중국唐의 철강성에서 태어났다. 초명初名은 장길張吉이다. 그의 아버지 장원張源은 당나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을 피해 배를 마련하여 다섯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향했는데, 도착한 곳은 강릉 경포였다. 이후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서 고창(안동)에 이르게 된다. 안동에 정착한 장정필은 18세 무렵에 중원中原(중국 지금의 하남성 · 산동성 서부 · 하북성 동부 일대)으로 가는 사신 일행을 따라 당나라로 갔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아무튼 그는 중국의 친척들이 다져놓은 경제적 기반 덕분에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고, 24세의 나이로 과거에 장원했다. 하지만 학문에 대한 뜻을 버릴 수 없어 벼슬길로 나가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 학문에 몰두했는데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문하생이 수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자 소문을 전해 들은 당나라 조정에서 정사政事에 참여해줄 것을 간청하여 벼슬에 올라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재임 중 동료에 의한 무고誣告로 벼슬에서 내려오게 되는데, 아마도 이 무렵에 안동으로 다시 돌아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는 김선평, 권행과 함께 고려의 왕건에게 협력하여 대상大相의 벼슬을 내려 받고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에 책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