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선조가 그 당시의 명필 한석봉에게 명을 해서 도산서원 현판을 쓰게 하였는데. 이 때 선조가 생각하기를 만약 내가 도산서원 현판이라고 한석봉이에게 가르쳐 주면, 놀래서 붓이 떨려 글씨가 잘 안되께라. 싶어가 가르쳐 주지 않고, 도산서원 네 글자를 거꿀로 한 자 한 자 불렀어요. 그래 한석봉이는 영문도 모르고 받어 쓰는게라. 맨처음에 원(院)자를 쓰고, 다음에 서(書)자, 다음에 산(山)자, 그리고 인제 마지막에 도(陶)자를 쓰게 했어. 한석봉이는 원, 서, 산자를 쓰고 나서 도자를 임금이 부르이께네 아하 이거 내가 도산서원 현판을 쓰는 구나. 딱 알아챘어요. 그래 고마 놀래가 붓이 떨려서 마지막 도(陶)자를 비뚤게 썼어요. 그래가 도산서원 현판에 글씨가 약간 삐뚤지.
내고향 전통 가꾸기 / 1984 / 안동군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영주 부석사를 다 지은 다음, 종이 학을 만들어서 날렸는데, 그 학이 신기하게도 날아서 서후리에 있는 천둥산 뒤쪽 기슭에서 떨어졌어. 그래 의상조사가 이 곳에서 도를 닦겠다. 하고는 자리를 닦아서 절을 지은 것이 봉서사래. 봉서사를 다 지은 다음에 또 종이학을 날랬는데 이번에는 천둥산을 넘어서 떨어졌어. 그래 지은절이 봉정사래
한국구비문학대계(안동시) / 1982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옛날에 농암선생이 도산면 분천리에 애일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현판을 걸기 위하여 중국에 있는 명필에게 글씨를 받으려고 제자를 보냈거든. 중국까지 먼 길을 가게된 제자는 반 년 만에 고생 고생해서 중국에 도착해서 명필을 찾아 한 달 넘도록 헤메고 다녔어요. 한참을 다니다가 드디어 깊은 산중에 있는 명필을 발견하고는 조선국 농암선생 이야기를 하면서 애일당 현판 글씨를 청하였그던.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의 글씨를 받으려고 그 머나먼 길을 왔으니 내 대번에 글씨를 써 주도록 하지. 하면서 산에서 꺾어온 칡줄기로 먹을 듬뿍 찍더니 단숨에 '애일당' 석자를 써주거든. 좋은 붓에 근사한 먹을 갈아서 정성스레 써줄 것을 기대했던 제자가 내심 마음에 차지 않거든. 이렇게 보니 그건 글씨가 아니라 장난으로 휘갈긴 글씨 같거던. 그래 제자가 다시 써줄 수 없느냐고 재차 청을 했거든. 그러자 중국 명필은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 하더니만 쓴 종이를 두어번 흔드니 글자가 마구 꿈틀거리더니 세 마리 하얀 학이 되어 날아가 버리거든. 그제서야 제자는 자신이 잘못한 줄 알고 다시 써 줄 것을 빌었어요. 제자가 며칠 동안 간절히 청했지만 끝내 써주지 않더니만 마지막에 가서 하는 말이 이 아래에 내려가면 나보다 더 낮게 쓰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찾아가 보라. 그래서 제자는 할 수 없어서 그가 말한 대로 산 아래에 있는 명필을 찾아갔어요. 찾아가니 하는 말이 산중에 계신 분이 우리 스승님인데 그곳을 찾아가 보시오. 하거든. 그래서 자신이 당한 일을 소상히 이야기 하니 중국에서도 남에게 글씨를 주지 않는 분인데, 특별히 조선국에서 왔다하여 써 준 것 같은데.하면서 하며 자기의 글씨는 스승 글씨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고 학 세 마리는 못되어도 한 마리 정도는 된다고 말하면서 붓을 들어 정중히 써 주드라 그래. 우여곡절 끝에 글씨를 받아 가지고 돌아온 제자는 농암선생 볼 낮이 없어,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안 해 주다가 그가 세상을 뜬 후에 사실이 밝혀졌다고 그래. 그러던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정자를 쓸어 갔는데 현판도 같이 떠내려가서 영영 잃어버렸다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떤 어부가 고기를 잡으려고 강에 나갔더니만 무언가 금빛 찬란한 것이 떠내려 오드라그래. 그래 건져보니 그게 애일당 현판이었다 그래.
안동군 / 1984 / 내고장 전통가꾸기
조선시대 때,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오게 되었어.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와 보니 이상하게도 안동지방에 눈병 환자가 많은 게라. 맹사성은 풍수지리에 밝아서 안동지형을 가만히 살펴보니 안동의 지세가 눈병이 많은 지세거든. 그래서 당시 흥국사라는 절을 개목사(開目寺)라고 이름을 바꾸었어. 그 후부터는 차츰 눈병환자가 없어졌다고 그래.
안동군 / 1984 / 내고장 전통가꾸기
영호루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라 그러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이곳에 머무를 때 친히 쓴 글씨인게라, 공민왕의 친필이니 만큼 현판 글씨의 필치는 참말로 잘 썼다고 사람들이 그래. 옛날부터 영호루가 수 차례 물 때문에 유실됐는데도 현판만은 지금까지 보존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현판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거든. 원래 영호루에는 여러 개의 현판이 있었는데, 당대 유명한 사람이 오면, 저마다 글을 지어가 붙여둬서 그렇게 현판이 많아지게 된게라. 그래도 그른 현판은 홍수만 나면 떠내려가고 보이지가 않아요. 언젠가 영호루 현판도 홍수에 떠내려 갔었는데 상주땅 어딘가에서 서기가 비치드래. 그래 가보니 그게 영호루 현판이라. 그래가 영호루 현판이 아직도 영호루에 꺼떡없이 걸레 있게 된게라
안동시 옥정동 태사묘 / 권재영 , 남 , 66
예전에 그 저 제비원이란데, 원이라는 처자가 하나 살았어요. 원이라는 처자는 제비원에서 음식영업을 했어요. 인제 그 음식을 팔고 이래도 돈 없는 사람 배고픈 사람이 오게 된 경우에는 돈도 안 받고 그양 밥을 줬어요. 그이 인제 장사를 하여도 영리적으로 하는 게 아이고 원이라는 처자가 착해가지고 자선사업을 마이 했어요. 근데, 이송천이 삼송천(三松川) 김씨 성을 쓰는 큰 부자가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아들이 고마 젊었을 때 비명에 가부렀어요.그래 인제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갔는데, 염라대왕 하는 말이 니는 아직 들어올 때도 안 됐는데, 왜 들어왔느냐? 근단 말이래. 내가 죽었다 카이 들어왔다. 하고 대답을 하니 그래 잘못 들어왔으니 그만 나가라! 하고 염라대왕이 근단 말이래. 근데 또 하는 말이 가긴 가는데 자선사업을 좀 하고 가라. 이랜단 말이래, 그래 이송천 부자 아들이 자선사업 할라하니, 빈손으로 왔는데, 자선사업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랬거든. 그럼 여기에 원이가 저장한 창고가 저기 어디 가먼 있다 말이래. 금, 은, 보화가 들은 창고가 있으이, 그 창고의 반만 내가주 사람을 도우고 가라고. 그리고 반을 꺼내가주고 줬어. 그리고는 갚을 때는 어예갚노 하면 니 살림을 원이한테 반만 주란 말이래. 그라고, 한 사날 있다가 깨났단 말이래. 그 집에서 얼마나 반가울로? 그래 살아나오니 거기서 들은 기억이 생생하게 나거든요. 그래 인제 자기 재산 반을 가주고 원이한테 찾아갔거든. 내가 저승에 가이, 니 창고가 있더란 말이래. 있는데, 니 재산을 내가 쓰고 왔이께네, 염라대왕이 내 살림을 반을 주라고 하더라. 그러니 내 반 주겠다 말이래. 반 받아라. 그래서 원이가 받았단 말이래. 지는 노력해가 번 것도 아이고, 반을 그양 얻었지 그래서 받아가 거기다 미륵불을 중심으로 해가주 법당을 하나 세웠다 말이래. 그게 연미사래
북후면 옹천리 / 1981 / 강대각 , 남 , 62
흥국사라는 절이 있는데 아흔 아홉 칸이나 되는 큰 절이래, 이 절을 어떻게 지었는가 하면 구십 구 칸을 하루 한 칸씩 지었다 그래요. 그러니 구십 아홉 칸 짓는데, 구십 구일만에 다 짓다니더. 그렇게 날래(빠르게) 짓다니더. 흥국사가 있는 산도 대 명산이라. 요새 와서는 천등산이라 말하는데, 의상조사가 하늘에서 조명탄 같은 탄이 터저 불이 내려왔다고 해서, 천등산(天燈山)이라 한다디더.
북후면 옹천리 / 1981 / 강대각 , 남 , 62